늙은 부모를 지게에 짊어지고 산에 버렸다는 이야기는 사실일까요?
- 고려 시대가 실제로는 효(孝)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아봅니다.
- ‘고려장’ 이야기의 진짜 기원이 어디인지 추적합니다.
- 이 이야기가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왜곡되고 이용되었는지 분석합니다.
많은 한국인의 기억 속에는 아들이 늙은 부모를 지게에 싣고 깊은 산속에 버리는, 가슴 아픈 장면이 남아있습니다. ‘고려장’이라는 이름으로 각인된 이 풍습은 오랫동안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한 페이지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역사에 정말 이런 슬픈 풍습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가 아닙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교훈을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어느 순간 우리 역사에 슬며시 들어와, 억압의 도구로 변질된 거짓의 유령일 뿐입니다. 이제부터 그 유령의 정체를 파헤치는 역사 탐정의 여정을 시작하겠습니다.
1. 진짜 고려: 노인을 공경했던 왕국의 모습
고려장 신화와 실제 고려의 역사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려 사회는 구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부모를 버리는 행위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효(孝)와 자비(慈悲)의 사회
고려의 정신적 토대는 유교의 **효(孝)**와 불교의 **자비(慈悲)**였습니다. 효는 왕에 대한 충성의 뿌리로 여겨졌으며(“충신은 효자의 문에서 나온다”), 국가는 효심 깊은 자식들의 이야기를 널리 알려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겨울에 개구리를 구해 어머니를 살린 서능,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에게 복수한 최누백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법으로 다스린 불효
고려는 불효(不孝)를 반역에 버금가는 중죄로 다스렸습니다. 『고려사』 형법지에는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않거나, 상중에 오락을 즐기는 등의 행위를 징역이나 유배로 처벌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부모 살해 모의와 같은 극단적인 범죄는 반역죄에나 적용되던 능지처참이라는 최고 형벌에 처해졌습니다.
국가가 책임진 노인 복지
고려 조정은 노인들을 위한 복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습니다.
- 양로연(養老宴): 왕이 직접 80세 이상 노인들을 초청해 음식과 선물을 내리는 국가적 경로잔치였습니다.
- 의료 기관: 동서대비원과 혜민국을 두어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의료와 약을 제공했습니다.
- 실질적 지원: 병든 부모를 돌볼 수 있도록 관료에게 휴가를 주거나(시병가), 노부모를 모시는 자제의 병역을 면제해 주기도 했습니다.
고려장 신화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은 관련 증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되는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2. 고려장 이야기의 진짜 기원: 인도와 중국의 우화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고려장 이야기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 뿌리는 우리 역사가 아닌,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던 교훈적인 우화에 있습니다.
기로설화(棄老說話): 보편적인 교훈담
늙은 부모를 버린다는 설정의 이야기는 ‘기로설화(棄老說話)‘라는 하나의 장르로, 인도, 중국 등 유라시아 전역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실제 풍습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노인의 지혜와 효도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도덕 우화입니다. 일본의 ‘우바스테야마(노파를 버리는 산)’ 전설이 실제 관습의 증거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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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온 ‘지게’ 이야기
우리가 흔히 아는, 아들이 손자에게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는 중국의 『효자전(孝子傳)』에 실린 ‘원곡’의 이야기에서 유래했습니다. 할아버지를 버린 아버지가 운반 도구를 버리려 하자, 손자가 “나중에 아버지를 버릴 때 쓰겠다"고 말해 아버지를 뉘우치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조선 시대 『삼강행실도』에도 실려, 효를 가르치는 외국 우화로 명확히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불경에서 온 ‘문제 해결’ 이야기
노인의 지혜로 나라의 위기를 해결한다는 또 다른 유형의 이야기는 불교 경전인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왔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기로국(棄老國)’, 즉 ‘노인을 버리는 나라’라는 가상의 국가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오해가 발생합니다.
수백 년간 이야기가 구전되면서, 가상의 나라 ‘기로국(棄老國)‘이 실제 역사 속 ‘고려국(高麗國)‘과 발음이 비슷해 뒤섞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국의 우화가 한국의 역사로 둔갑하게 된 결정적 계기입니다.
3. 왜곡의 시작: 식민사관이 고려장을 무기로 삼은 이유
효도를 장려하던 우화는 20세기 들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악의적인 무기로 변질됩니다.
일본의 식민사관(植民史觀)
일제는 한국사를 정체되고 미개한 역사로 묘사하는 식민사관을 퍼뜨려 한국인의 민족적 자긍심을 꺾으려 했습니다. 고려장 이야기는 한국인이 부모마저 버리는 야만적인 민족이므로, 일본의 ‘문명화된’ 통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완벽한 도구였습니다.
무덤 도굴을 위한 명분
더욱 냉소적인 목적도 있었습니다. 바로 고려 시대 무덤 도굴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고려 귀족의 무덤을 파헤치면서, “이것은 조상의 묘가 아니라 자식에게 버려진 고려장 터이므로 도굴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거짓 명분을 퍼뜨렸습니다.
세뇌의 도구들
이 신화는 1924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동화집』**에 실려 학생들에게 주입되었고, 윌리엄 그리피스 같은 서양인들이 일본 측 자료에만 의존해 쓴 책 『은자의 나라 한국』을 통해 국제적으로 확산되며 거짓된 권위를 얻었습니다.
4. 결정적 증거: ‘고려장(高麗葬)‘의 진짜 의미
그렇다면 ‘고려장’이라는 단어는 원래 무슨 뜻이었을까요? 조선 시대 기록을 보면 그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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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사용된 ‘고려장(高麗葬)‘은 늙은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아니라, 단순히 ‘고려 시대 방식의 장례’ 또는 ‘고려 시대의 무덤’을 뜻하는 중립적인 고고학 용어였습니다. 『승정원일기』와 같은 기록에는 “고려장(高麗葬)은 쇠못을 많이 썼다"와 같이, 고려 시대의 독특한 장례 양식(화장, 석실묘 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등장합니다.
식민주의자들은 이 중립적인 단어의 원래 의미를 지우고, 그 자리에 자신들이 만든 야만적인 풍습의 이름을 덧씌웠습니다. 이것은 역사 왜곡을 넘어선 ‘언어적 납치(linguistic hijacking)’ 행위였습니다. 단순한 오해였을까요, 아니면 의도적인 언어적 도용이었을까요?
비교: 우화와 왜곡된 신화
특징 | 원전 우화 (효자전 / 잡보장경) | ‘고려장’ 신화 |
---|---|---|
배경 | 고대 중국 / 가상의 ‘기로국(棄老國)’ | 역사 속 고려 시대, 한국 |
갈등 | 아들의 개인적 비도덕 / 왕의 어리석은 법 | 역사적 사실로 제시된 국가적 관습 |
영웅 | 순수한 손자 / 지혜로운 노인 | 영웅 없음. 풍습 자체가 부정적 특성. |
결말 | 가족의 회복 / 법 폐지 | 무덤 도굴을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 |
원래 교훈 | 효는 중요하다 / 노인의 지혜는 소중하다. | (왜곡된 교훈) 한국인은 야만적이다. |
결론
늙은 부omo를 버리는 풍습으로서의 고려장은 완벽한 허구입니다. 그 진실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현실: 고려는 법과 제도로 노인을 공경하고 보호했던 효의 왕조였습니다.
- 기원: 고려장 이야기는 효를 가르치기 위해 외국에서 들어온 도덕 우화였습니다.
- 왜곡: 이 우화는 한국인을 폄하하고 문화유산을 약탈하려던 일제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변질되었습니다.
고려장 신화는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비밀이 아니라, 식민주의가 남긴 고통스러운 상처입니다. 이제 이 진실을 아셨으니, 주변에서 고려장 이야기가 나오면 부드럽게 바로잡아 주세요. 거짓의 유령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노인을 공경했던 우리 조상들의 진짜 역사로 채워나가는 데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참고자료
- 고려장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0%A4%EC%9E%A5
- 고려장은 고려의 장례풍습이였다? - Steemit https://steemit.com/kr/@kanade1025/6xo7ch-11
- 고려장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A%B3%A0%EB%A0%A4%EC%9E%A5
- 고려장 - YTN 사이언스 https://m.science.ytn.co.kr/program/view.php?s_mcd=1165&key=201711271007371433
- 효(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627
- 노인복지(老人福祉)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870
- 고려장 설화(高麗葬 說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488
- 식민사관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B%9D%EB%AF%BC%EC%82%AC%EA%B4%80
- [역사속 경제리뷰] 고려장 - 파이낸셜리뷰 http://www.financialreview.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