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 역사

고려·조선 시대 해외 파병: 역사의 목소리로 듣다

phoue

8 min read --

강요된 전쟁의 슬픔, 정당한 분노, 교활한 외교, 쓰디쓴 승리… 네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시대의 격랑을 마주합니다.

  • 네 가지 주요 해외 파병(일본 원정, 대마도 정벌, 사르후 전투, 나선 정벌)의 역사적 맥락
  • 전쟁 이면에 숨겨진 개인의 고뇌와 국가적 딜레마
  • 과거의 군사적 결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사의 목소리들: 바다 건너 전장의 기록

먼지 쌓인 서고(書庫) 깊숙한 곳에는 붓으로 눌러쓴 역사서만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행간에는 이름 모를 병사들의 함성과, 장수들의 고뇌, 그리고 왕들의 결단이 서려 있지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대마도 정벌’, ‘나선 정벌’… 책 속의 마른 활자들은 그저 사건을 나열할 뿐이지만, 그 뒤에 숨겨진 생생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낼 때 역사는 비로소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여기, 시대의 격랑을 온몸으로 겪어낸 네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제국의 야망에 휩쓸려 낯선 바다로 향해야 했던 고려의 소년 병사, 나라를 유린하는 해적들을 응징하기 위해 칼을 빼 들었던 고려 말의 장수, 두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를 택해야 했던 비운의 군주를 모셨던 조선의 문신, 그리고 원수를 갚기 위해 길러낸 칼을 원수를 위해 써야 했던 조선의 무관.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강요된 전쟁의 슬픔과 정당한 분노, 교활한 외교와 쓰디쓴 승리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영웅의 무용담이 아니라,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 스러져간 수많은 이들을 위한 진혼곡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질문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들이 겪었던 전쟁들의 개요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표 1: 고려 및 조선의 주요 해외 파병 요약

파병 명칭연도/왕조주요 결과
여몽연합군 일본 원정 (1차)1274년 / 고려태풍으로 인한 실패, 막대한 인명 손실
여몽연합군 일본 원정 (2차)1281년 / 고려태풍으로 인한 파멸적 실패
박위의 대마도 정벌1389년 / 고려승리, 왜구 선단 격파 및 포로 구출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1419년 / 조선전략적 승리, 계해약조 체결의 배경
사르후 전투 파병1619년 / 조선명나라 군 패배 후 전략적 항복, 인조반정의 빌미
나선 정벌 (1, 2차)1654, 1658년 / 조선청-조선 연합군의 결정적 승리

제1장: 대칸의 야망과 고려의 눈물 - 어느 소년 병사의 회고 (1274년, 1281년)

내 이름은… 이제 와서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대칸의 야망에 휩쓸려 끌려갔던 수많은 고려의 젊은이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수십 년간 몽골과 싸우느라 온 땅이 잿더미가 된 뒤였지요.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왔지만, 나라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었고, 황제 쿠빌라이 칸의 욕심은 바다 건너 일본까지 향하고 있었습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몽골장군
대규모 함선 건조에 동원된백성들의 고통이 서린 조선소의 상상도.

절망의 조선소

어느 날 징집령이 떨어졌습니다. 저와 같은 사내들은 남쪽 해안의 합포, 지금의 창원으로 끌려갔지요. 그곳에서 본 것은 끝도 없는 벌목장이었습니다. 쿠빌라이가 일본을 치려 하니, 고려가 배 900척을 만들라는 명이었습니다. 전국에서 3만 5백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지요. 굶주림 속에서 나무를 베고 판자를 붙였습니다. 쓰러지는 이가 속출하자, 원나라에서 군량미 2만 석을 보내와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건 협력이 아니라 착취였습니다. 1274년 1월에 시작된 일은 넉 달 만에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바람과 번개같이’ 해치웠다고 했지만, 그 넉 달은 제게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우리를 비극으로 밀어 넣을 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신풍(神風)의 분노와 두 번의 지옥 (1274년, 1281년)

내가 만든 배에 실려 바다로 나갔습니다. 몽한군 2만 5천에 우리 고려군 8천, 뱃사공과 일꾼 6천7백 명. 도합 4만 대군이었습니다. 대마도와 일기도에서 벌어진 일은 전투가 아닌 학살이었습니다.

우리 고려군의 활은 작고 강력했고, 화살촉의 독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이었습니다. 하카타 만에 상륙했을 때, 우리는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몽골 지휘부는 갑자기 퇴각을 명령했습니다. 김방경 장군님께서 강력히 반대했지만 소용없었지요. 찝찝한 마음으로 배에 올랐고, 그날 밤 지옥이 찾아왔습니다.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폭풍이 몰아쳐 배들이 서로 부딪혀 박살 났습니다. 하룻밤 새 200여 척의 배가 가라앉고 1만 3천5백 명이 넘는 전우들이 바닷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를 ‘가미카제(神風)‘라 부르며 신에게 감사했다지요.

Advertisement

하지만 쿠빌라이의 야망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7년 뒤, 그는 더 거대한 원정군을 일으켰습니다. 도합 14만 대군이었지요. 고려는 또다시 전함 900척과 군량 11만 석을 쥐어짜야 했습니다. 두 번째 원정은 처음부터 삐걱거렸습니다. 일본은 해안에 방어벽을 쌓고 완강히 저항했고, 우리 진영에는 전염병까지 돌았습니다. 약속된 강남군을 기다리다 지쳐갈 무렵,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태풍이 몰아쳤습니다. 4천 척에 가까운 배들이 뒤엉켜 깨졌고, 강남군은 군사 10만 명을 거의 모두 잃었다고 합니다. 두 번의 원정으로 우리는 수만 명의 목숨과 국력을 바쳤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제2장: 남해의 재앙을 쓸다 - 어느 고려 장수의 회고 (1389년, 1419년)

내 이름은 박위. 고려의 무장으로 태어나 조선의 개국을 지켜본 산증인일세. 내 젊은 시절, 나라는 원나라의 그늘 아래 신음했지만, 그들이 북쪽으로 쫓겨간 뒤에도 바다는 조용하지 않았네. 일본의 해적인 왜구(倭寇)가 새로운 재앙이 되어 우리 해안을 유린했지. 일본 원정 때의 군인들이 나라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갔다면, 우리는 내 가족과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칼을 잡았네.

신속한 응징 (1389년)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은 극에 달했고, 그들의 소굴은 대마도였네. 1389년, 마침내 조정은 결단을 내렸고, 내가 100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정하게 되었지. 우리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네. 우리는 번개처럼 대마도를 급습하여 적선 300여 척을 불태우고 그들의 소굴을 짓밟았네. 가장 큰 성과는 왜구에게 잡혀갔던 우리 백성 100여 명을 구출한 것이었지. 이 통쾌한 승리로 왜구의 기세는 한풀 꺾였고, 우리는 우리 바다의 주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여주었네.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
이종무 장군의 지휘 아래 대마도를 정벌하는 조선 수군의 위용.

퇴위한 왕의 분노와 새로운 왕조의 위엄 (1419년)

세월이 흘러 고려는 가고 조선이 들어섰네. 세종대왕 즉위 첫해인 1419년, 굶주린 왜구들이 우리 충청도 비인현을 침략했네. 당시 군권은 상왕이신 태종 전하께서 쥐고 계셨는데, 그분의 분노는 대단했지. “지금 대마도는 비어있을 것이니, 즉시 그들의 빈집을 치고 돌아오는 주력 부대는 바다에서 섬멸한다.”

그렇게 ‘기해동정(己亥東征)‘이 시작되었네. 이종무 장군이 이끄는 227척의 함대와 1만 7천여 군사가 동원되었지. 6월 20일, 우리는 대마도에 상륙하여 적의 가옥 1,940여 호와 선박 129척을 불사르고, 포로로 잡혀 있던 중국인 131명을 구출했네.

힘과 외교의 조화

그때, 요동으로 갔던 왜구 주력 부대가 명나라 군에게 궤멸되었다는 극적인 소식이 들려왔네. 태종 전하께서는 즉시 군대를 철수시키고 외교적 압박으로 전환하셨지. “대마도는 예부터 우리 조선의 땅이니, 신하의 예를 다하든지, 계속 우리의 적이 될 것인지 선택하라.” 결국 대마도주는 무릎을 꿇고 복속을 맹세했네. 이후 ‘계해약조(癸亥約條)‘를 통해 평화로운 질서를 세우셨지. 진정한 승리는 적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을 넘어, 그 힘을 바탕으로 평화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을 이 경험을 통해 배웠네.


제3장: 두 마리 용의 사이에서 - 어느 문신의 고뇌 (1619년)

저는 광해군 전하를 가까이서 모셨던 문신입니다. 제가 겪었던 사르후 전투는 칼과 창으로만 싸운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명분과 실리, 의리와 생존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참으로 고통스러운 전쟁이었지요.

칼날 위의 왕국

당시 조선은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북쪽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이 일어서고 있었고,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왔던 명나라는 기울어가는 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명나라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으라며 파병을 요구해왔습니다. 신하들은 ‘부모의 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며 명분을 외쳤지만, 광해군 전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나라의 존망이 걸렸는데, 어찌 의리 하나 때문에 모험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장수에게 내린 비밀 명령

결국 파병을 결정하셨고, 도원수로는 강홍립 장군이 임명되었지요. 출정 전날 밤, 전하께서는 강홍립 장군에게 밀지(密旨)를 내리셨습니다. 그 내용은 “상황을 잘 살피되, 명나라 군의 패색이 짙어지거든 부질없이 싸우다 옥쇄하지 말고, 후금과 화의하여 군사들을 보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 백성의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군주의 고뇌에 찬 결단이었습니다.

Advertisement

사르후 전투의 조선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고뇌하며 전장으로 향하는 조선군.

계산된 항복과 정치적 재앙

1만 3천의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사르후 들판에서 명나라 주력군이 궤멸되는 것을 본 강홍립 장군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후금에 항복했고, 덕분에 대부분의 조선군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패배였지만, 외교적으로는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내 정치적으로는 재앙이었습니다. 정적들은 이 사건을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부모의 나라를 배신한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고, 결국 이 명분은 인조반정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실리를 택했던 현명한 군주는 쫓겨나고, 명분만을 내세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조선은 결국 두 차례의 끔찍한 호란(胡亂)을 겪게 되었습니다.


제4장: 북벌의 기묘한 여정 - 어느 조총 교관의 회고 (1654년, 1658년)

나는 효종 임금의 명을 받아 북벌(北伐)을 위한 정예 조총 부대를 양성하던 교관이었네.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임금의 꿈은 우리 모두의 꿈이었지. 우리는 비밀리에 군비를 확충하고, 특히 조총수들을 훈련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네.

아이러니한 부름

그런데 1654년, 청나라에서 황당한 요구를 해왔네. 북쪽 흑룡강 유역에 ‘나선(羅禪)’, 즉 러시아인들이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데, 조선의 정예 조총 부대를 보내달라는 것이었어. 기가 막힐 노릇이지 않은가! 우리가 청나라를 치기 위해 피땀 흘려 키운 군대를, 바로 그 청나라를 위해 싸우게 하다니. 하지만 우리는 청의 속국이었고,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네.

나선 정벌 전투 장면
흑룡강 유역에서 러시아 코사크 군을 상대하는 조선의 정예 조총 부대.

흑룡강의 격돌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우리 조총 부대가 파견되었네. 흑룡강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는 놀라웠네. 덩치가 산만 한 나선 병사들은 신식 총포로 무장했지만, 우리 조총수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 ‘탕! 탕! 탕!’ 일제사격에 나선 병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네. 두 차례의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거의 섬멸되었지만, 우리 측 피해는 전사자 8명, 부상자 25명에 불과했네. 이 전투는 조선 조총 부대의 뛰어난 역량이 세계적인 수준임을 증명한 사건이었지. 나는 개선하는 장병들을 맞으며 만감이 교차했네. 그들의 무공은 자랑스러웠지만, 그 승리가 우리의 숙적인 청나라의 승리라는 사실이 가슴을 쓰리게 했지.

네 번의 해외 파병, 무엇이 달랐을까?

네 가지 해외 파병은 모두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각 전쟁의 동기와 결과를 비교해 보면 역사의 교훈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 여몽연합군 일본 원정:
    • 동기: 원나라의 제국주의적 야망
    • 주체성: 고려의 의지와 무관한 강제 동원
    • 결과: 막대한 인명·물자 손실과 내정 간섭 심화
  • 대마도 정벌:
    • 동기: 왜구의 약탈에 대한 적극적 방어
    • 주체성: 국가와 백성을 지키려는 자주적 결단
    • 결과: 왜구 세력 약화 및 외교적 우위를 통한 평화 구축
  • 사르후 전투 파병:
    • 동기: 명나라의 파병 요구와 후금의 부상이라는 외교적 압박
    • 주체성: 국익을 위한 전략적 선택 (실리 외교)
    • 결과: 군사적 패배 속 인명 보존, 그러나 국내 정치적 재앙 초래
  • 나선 정벌:
    • 동기: 종주국 청나라의 군사 동원령
    • 주체성: 거부할 수 없는 의무적 파병
    • 결과: 조선군의 우수성 입증, 그러나 북벌의 꿈은 좌절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결론: 역사의 메아리에서 얻는 교훈

네 사람의 이야기는 시대와 상황은 달랐지만, 결국 ‘국가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집니다. 이들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핵심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힘의 오용은 비극을 낳습니다: 대칸의 야망에 휩쓸린 소년 병사의 이야기는 지혜 없이 휘두르는 힘이 얼마나 큰 참사를 낳는지 보여줍니다.
  2. 힘과 지혜는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대마도 정벌은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외교적 실리를 얻어 평화를 구축한 최고의 사례입니다.
  3. 실력은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도 빛납니다: 비록 원수를 위해 싸워야 했지만, 나선 정벌에서 조선 조총 부대가 보여준 역량은 미리 준비된 힘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역사의 교훈이 오늘날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준다고 생각하시나요? 과거의 해외 파병 역사를 거울삼아 현재 우리의 위치를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자료
  • 일본원정(日本遠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링크
  • 한경닷컴 - 740년 전 고려 정예군 8000명, 왜 하카타만까지 갔을까 링크
  • 충청투데이 - [오늘의 역사]박위, 대마도 정벌 링크
  • 대마도 정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링크
  • KISS - 세종대 대마도정벌의 군사적 전개과정 링크
  • 동북아역사넷 - 정묘‧병자 전쟁과 새로운 질서의 형성 링크
  • 사르후 전투 - 나무위키 링크
  • 나선정벌(羅禪征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링크
  • 우리역사넷 - 나선 정벌 링크
#해외파병#여몽연합군#대마도정벌#사르후전투#나선정벌#역사이야기##

Recommended for You

쇠락하는 조선, 민중의 희망이 된 『정감록』: 당신의 미래 지도는 어디에 있나요?

쇠락하는 조선, 민중의 희망이 된 『정감록』: 당신의 미래 지도는 어디에 있나요?

8 min read --
"M&M's와 스니커즈, 그리고 마스(Mars)의 성공을 만든 비밀 원칙 5가지"

"M&M's와 스니커즈, 그리고 마스(Mars)의 성공을 만든 비밀 원칙 5가지"

5 min read --
철의 왕국 고구려, '역대급 황제' 당 태종을 꺾은 비결

철의 왕국 고구려, '역대급 황제' 당 태종을 꺾은 비결

3 min read --

Advertisemen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