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수학의 두 거인을 통해 보는 서로 다른 사유의 방식과 그 유산
- 동양의 ‘구고현의 정리’와 서양의 ‘피타고라스 정리’의 근본적인 차이점
- 수학이 각 문명의 세계관을 어떻게 반영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 신라 석굴암부터 조선 앙부일구까지, 한국사에 적용된 수학 원리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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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고현의 정리: 실용으로 증명된 진리
직각삼각형의 세 변 사이의 관계($a^2+b^2=c^2$)는 동서양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탐구되었습니다. 동양에서는 구고현의 정리라는 이름으로, 실용적 문제 해결 과정에서 그 원리가 발견되고 활용되었죠. 이 정리는 고대 중국 수학의 정수를 담은 『구장산술』을 통해 체계화되었습니다.
『구장산술』: 문제 해결을 위한 지침서
『구장산술(九章算術)』은 고대 중국의 수학 지식을 집대성한 책으로, 추상적 이론이 아닌 철저히 실용적인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방전(토지 측량)’, ‘상공(토목 공사)’ 등 각 장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관료와 기술자들이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침서였습니다. 모든 문제는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하고(“금유(今有)…”), 해결 절차, 즉 알고리즘을 설명하는(“술왈(術曰)…”) 구조를 따릅니다. 이는 추상적인 증명보다 반복 적용 가능한 해결 절차의 확립을 중시했던 중국의 실용주의적 수학 전통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유휘의 증명: 자르고 붙여서 보여주는 지혜
구고현 정리에 대한 최초의 논리적 해설은 3세기 수학자 유휘(劉徽)의 주석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출입상보(出入相補)’**라는 독창적인 원리를 통해 이 정리의 정당성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했습니다.
‘출입상보’는 도형을 여러 조각으로 자른 뒤, 퍼즐처럼 재배치하여 넓이가 같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밑변(勾, a)과 높이(股, b)의 정사각형을 잘라 빗변(弦, c)의 정사각형을 빈틈없이 채우는 과정을 통해 $a^2+b^2=c^2$ 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논리적 필연성을 따르는 연역적 증명이 아니라, 면적 보존 원리에 기반한 알고리즘적 시연에 가깝습니다. 증명의 목표는 보편적 진리의 확립이라기보다, 계산을 위한 신뢰할 수 있는 규칙을 실증하는 데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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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 정리: 논리로 쌓아 올린 금자탑
서양에서 이 정리는 피타고라스 정리로 알려져 있으며, 그 발전 과정은 동양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스 수학은 우주의 질서를 ‘수(數)‘로 이해하려는 철학적 탐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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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수의 발견과 철학적 위기
피타고라스 학파는 “만물의 근원은 수"라는 믿음을 가졌지만, 자신들의 정리 때문에 신념 체계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습니다. 바로 ‘통약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즉 무리수의 발견 때문이었습니다.
한 변의 길이가 1인 직각이등변삼각형의 빗변 길이($\sqrt{2}$)가 정수의 비로 표현될 수 없다는 사실은, 세상을 정수로 설명하려던 그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 모순은 그리스 수학이 관찰이나 계산을 넘어, 자명한 진리(공리)에서 출발해 논리적 단계로만 결론을 도출하는 연역적 추론의 길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클리드 『원론』: 연역적 증명의 정수
이러한 공리적 방법론의 정수는 유클리드의 『원론(Elements)』에서 집대성됩니다. 『원론』 제1권 47번째 명제로 등장하는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은, 유휘의 시각적 재배치와는 질적으로 다른 정교한 논리적 구성물입니다.
유클리드는 삼각형의 합동 조건과 넓이 관계에 대한 보조정리들을 논리의 사슬로 엮어, $a^2+b^2=c^2$ 이라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됨을 증명합니다. 이 증명은 독자에게 도형을 움직여보라고 요구하는 대신, 확립된 공리와 정리에 기반해 결론의 참됨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합니다. 증명 끝을 알리는 “Q.E.D.“는 이 명제가 현실과 무관한 닫힌 논리 체계 안에서 보편적 진리로서의 지위를 획득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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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실용주의 대 이상주의
두 증명은 수학적 진리에 접근하는 두 문명의 사유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중국의 방식은 그리스식 증명의 ‘실패한’ 시도가 아니라, 다른 수학적 사유 방식의 성공적인 구현이었습니다.
특징 | 구고현의 정리 (고대 중국) | 피타고라스 정리 (고대 그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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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문헌 | 『구장산술(九章算術)』 | 유클리드 『원론』 (제1권, 명제 47) |
증명 방식 | 시각적 분할 및 재배치 (출입상보) | 공리적-연역적 논증 |
철학적 기반 | 실용주의, 알고리즘 중심, 현실 문제 해결 | 이상주의, 추상성, 보편적 진리 추구 |
주요 응용 | 측량, 공학, 건축, 천문학 | 순수 기하학, 정수론, 철학의 기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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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 스며든 구고현의 원리
한국은 중국의 실용주의적 수학 전통을 받아들여 국가 경영의 핵심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건축: 신의 비례를 구현하다
혹시 전통 건축물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에 숨겨진 수학적 원리를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한옥의 서까래와 추녀 길이를 결정하고, 건물의 직각을 잡는 데 구고법(句股法)은 필수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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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국사와 석굴암: 신라 건축의 걸작인 불국사와 석굴암은 수학적 정밀성의 극치입니다. 석가탑과 다보탑의 안정적인 비례, 석굴암 내부의 완벽한 기하학적 균형은 모두 구고법을 통해 구현되었습니다. 여기서 수학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 불국토의 이상을 지상에 실현하는 신성한 언어였습니다.
국가 경영: 땅과 하늘을 재는 기술
구고법은 국가 통치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기술이었습니다.
- 토지 측량과 조세: 조선 시대 토지 측량 사업인 ‘양전(量田)‘에서 부정형의 토지를 직각삼각형으로 나누어 면적을 계산하는 데 구고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공평한 조세의 기반이 되는 국가 재정 행정의 핵심이었습니다.
- 천문기기 설계: 해시계인 앙부일구나 천체 관측 기기인 혼천의와 같은 정밀 기기를 제작할 때, 정확한 각도를 계산하고 부품을 설계하는 데 구고법의 원리가 기초가 되었습니다.
- 화성성역의궤: 수원 화성 축조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거중기 설계도 등은 구고법이 국가적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체계적인 공학 기술의 일부였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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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하나의 보편적 진리가 문화의 프리즘을 통해 어떻게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지, 구고현의 정리와 피타고라스 정리는 명확히 보여줍니다.
핵심 요약
- 동일한 진리, 다른 접근: 구고현의 정리는 실용적·알고리즘적 시연으로, 피타고라스 정리는 추상적·연역적 논증으로 증명되었습니다.
- 세계관의 반영: 이는 현실 문제 해결을 중시한 동양과 이상적 진리를 추구한 서양의 근본적인 사유 방식 차이를 보여줍니다.
- 한국사의 초석: 한국은 구고현의 정리라는 실용적 지식을 받아들여 건축, 천문, 행정 등 국가 경영의 핵심 기술로 발전시켰습니다.
다음번에 박물관이나 고궁을 방문하신다면, 아름다운 유산 속에 숨겨진 수학적 원리를 한번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안에서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실용 정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참고자료
- 구장산술(九章算術) 동양고전종합DB
- Nine Chapters on the Mathematical Art Shanghai Daily
- Illustrating The Nine Chapters on the Mathematical Art Mathematical Association of America
- 수학(數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The Nine Chapters on the Mathematical Art Wikipedia
- Exemplar 21: The Ancient Chinese Proofs on Pythagoras’ Theorem Education Bureau, Hong Kong
- [수학 산책] 피타고라스가 증명하기 500년 전에… 뉴스쿨
- 피타고라스 정리 KOCW
- Pythagorean theorem Wikipedia
- [궁금한S] 현대에서도 깜짝 놀라는 석굴암과 불국사의 과학 YTN
- 전쟁 이후 경지 면적 축소 우리역사넷
- 앙부일구 우리역사넷
- 화성성역의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