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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 안에 또 다른 내가 산다

phoue

3 min read --

숫자로 내 몸을 읽는 시대

“어? 오늘 300걸음밖에 안 걸었네. 지하철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걸어가야겠다.”

제 이름은 김민준, 마흔을 앞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제게는 언제나 함께하는 건강 비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왼쪽 손목에 채워진 스마트 워치죠. 이 작은 기계는 제 심박수, 수면 패턴, 걸음 수, 심지어 스트레스 지수까지 24시간 내내 감시하고 알려줍니다. 예전에는 그저 ‘피곤하다’고 느꼈던 컨디션 난조를 이제는 ‘어젯밤 깊은 수면 시간이 1시간 부족해서’라고 정확히 진단할 수 있게 되었죠. 내 몸을 숫자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짜릿한 해방감마저 느꼈습니다.

스마트 워치 화면을 보며 걸음 수를 확인하는 사람의 손목 클로즈업 이미지
스마트 워치 화면을 보며 걸음 수를 확인하는 사람의 손목 클로즈업 이미지

1장: ‘제2의 신체’를 만나다

본격적인 변화는 ‘유전자 검사’를 받은 후부터였습니다. 침 한 방울로 제 몸의 설계도를 엿볼 수 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거든요. 며칠 뒤, 제 스마트폰으로 빼곡한 데이터가 담긴 결과지가 날아왔습니다.

  • 나의 유전적 특성:
    • 카페인 분해 능력이 느림 (오후 커피는 금물!)
    • 알코올 분해 유전자 변이 (술 마시면 얼굴 빨개지는 이유)
    • 근력 운동보다 유산소 운동 효과가 더 좋음
    • 특정 암 발병 확률 평균보다 1.5배 높음

앞의 내용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롭게 봤지만, 마지막 항목에서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어쩌면 평생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질병의 그림자가 제 몸 위에 어른거리는 기분이었죠. 그날 이후, 저는 제 몸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지만, 데이터로 존재하는 **‘제2의 신체’**가 제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겁니다.

한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심각한 표정으로 확인하는 모습
한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심각한 표정으로 확인하는 모습

2장: 데이터의 노예가 되다

‘제2의 신체’는 아주 성실한 조언자였습니다. 저는 유전자 정보에 따라 식단을 바꾸고, 스마트 워치가 추천하는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수면 점수’를 확인했고, 80점 이하면 하루 종일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죠.

  • 건강 강박의 시작: ‘좋은 숫자’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겼습니다. 친구들과의 즐거운 술자리에서도 알코올 분해 유전자를 떠올리며 마음껏 즐기지 못했고, 회식 다음 날이면 ‘권장 활동 칼로리’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몸을 움직였습니다.
  • 감각보다 데이터를 신뢰: 분명 몸은 상쾌한데 수면 점수가 낮게 나온 날에는 왠지 더 피곤하게 느껴졌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심박수가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무리해서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새 저는 제 몸이 보내는 실제 신호보다 데이터라는 ‘제2의 신체’가 하는 말을 더 믿게 된 것입니다.

건강해지기 위해 시작한 일들이 오히려 저를 옥죄는 새로운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삶의 즐거움은 ‘관리해야 할 변수’가 되었고, 제 몸은 끊임없이 ‘최적화’해야 할 프로젝트가 되어버렸죠.

수면 점수, 심박수, 스트레스 지수 등 건강 데이터 그래프에 둘러싸여 불안해하는 사람의 이미지
수면 점수, 심박수, 스트레스 지수 등 건강 데이터 그래프에 둘러싸여 불안해하는 사람의 이미지

3장: ‘정상’과 ‘비정상’의 새로운 경계

더 큰 문제는 ‘정상’의 기준이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의사가 진단하기 전까지 저는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유전자 검사 결과 특정 질병 위험군에 속한 저는, 아직 아무 증상이 없더라도 예비 환자인 ‘비정상’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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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프지 않지만, 잠재적으로 아픈 사람”

이 애매한 경계선 위에서 저는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데이터는 제게서 ‘건강하다는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 갔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더 자주 병원을 찾게 되고, 사소한 신체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죠. 기술이 나를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병의 그림자 안에 가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상과 비정상 경계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미지
정상과 비정상 경계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미지

우리는 데이터의 주인인가?

저는 얼마 전, 스마트 워치를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습니다. 물론 데이터가 주는 유익함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삶의 주인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첫 번째 신체와 데이터로 구성된 두 번째 신체를 동시에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제2의 신체’는 우리에게 더 건강한 삶을 위한 놀라운 통찰력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하며 새로운 불안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데이터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우리 각자의 손에 달려있을 겁니다.

#디지털헬스#제2의신체#데이터#정량화된자아#스마트워치#유전자검사#건강염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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