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의 주인이 되는 꿈
“오늘부터 저는 제 인생의 사장입니다!”
저는 서른 중반, 10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매일 아침 지옥철에 몸을 싣고, 끝없는 보고서와 야근에 시달리던 삶이었죠. 제게 남은 건 상사의 잔소리와 ‘월급’이라는 달콤 씁쓸한 열매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플랫폼 경제’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만 일하고 월급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 그래, 바로 이거다! 더 이상 누군가의 지시를 받지 않고, 내 능력과 노력만으로 살아남는 진짜 ‘내 일’을 해보자. 그렇게 저는 부푼 꿈을 안고 플랫폼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1장: 자유로운 영혼, 디지털 노마드의 탄생
처음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번역과 문서 작업을 해주는 플랫폼에 제 프로필을 등록했죠.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노트북을 켜면, 전 세계에서 다양한 일거리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햇살 좋은 카페에서, 내일은 탁 트인 바닷가에서 일할 수도 있었죠. ‘디지털 노마드’의 삶이 현실이 된 겁니다.
- 시간과 공간의 자유: 9시 출근, 6시 퇴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한밤중에 일이 잘 될 때도 있었고, 평일 오후에 한가롭게 영화를 보기도 했죠.
- 노력만큼의 보상: 밤을 새워 프로젝트를 끝내면, 다음 날 통장에 찍히는 숫자는 월급날을 기다릴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즉각적인 성취감을 주었습니다. 회사에서처럼 동료의 실수나 상사의 무능력 때문에 내 성과가 깎일 일도 없었죠.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이제야 진짜 내 삶을 사는 것 같아”라고 자랑하곤 했습니다.
2장: 보이지 않는 상사, 알고리즘의 등장
하지만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자유롭다고 믿었던 이 세계에도 보이지 않는 규칙과 ‘상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상사의 이름은 바로 **‘알고리즘’**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제게 들어오는 일거리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죠. 고객의 평점이 조금이라도 낮아지거나, 메시지 응답이 몇 분이라도 늦어지면 플랫폼은 귀신같이 알고 저를 ‘좋은 일감’에서 배제하기 시작했습니다.
- 평점과 리뷰의 족쇄: 저는 고객의 사소한 불만에도 전전긍긍해야 했습니다. 별점 4.9점과 5.0점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고, 때로는 부당한 평가에도 ‘죄송합니다’를 연발해야 했죠.
- 실시간 감시: 제 접속 시간, 작업 속도, 메시지 응답률 등 모든 것이 데이터가 되어 저를 평가하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잠시 쉬려고 자리를 비우는 것조차 불안해졌죠.
- 통제된 자율성: 결국 저는 더 많은 일을 따내기 위해 플랫폼의 ‘추천’ 시간에 맞춰 알람을 설정하고, 단가를 낮춰서라도 일을 수주하려 애쓰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출퇴근만 없을 뿐, 보이지 않는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일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자유로운 사장님인 줄 알았는데, 저는 그저 데이터로 관리되는 부품에 불과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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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노동자인가, 자영업자인가
가장 큰 충격은 아플 때 찾아왔습니다. 독감으로 며칠 앓아누웠을 때, 제 수입은 ‘0’이었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는 당연하게 여겼던 유급휴가, 병가는 꿈도 꿀 수 없었죠. 퇴직금도, 4대 보험도 없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과연 노동자인가, 자영업자인가?’
플랫폼은 저를 ‘독립 계약자’ 또는 ‘파트너’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제게 일의 배분과 가격 책정에 대한 결정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상 플랫폼의 지시에 따라 일하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유령 같은 존재. 그것이 제 현주소였습니다.
- 사라진 안전망: 산재보험, 고용보험의 혜택 없이 모든 위험은 오롯이 제 몫이었습니다.
- 교섭력의 부재: 수수료가 일방적으로 인상되어도,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저는 혼자였습니다. ‘노동조합’과 같은 단체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죠.
이것이 바로 책에서 말하던 ‘리얼리티 쇼크’였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약속한 유토피아적 미래의 이면에는 이처럼 노동의 정의마저 흔들리는 혼란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저는 여전히 플랫폼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막연한 환상을 품지 않습니다. AI와 플랫폼 경제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며, 이 속에서 어떻게 나의 권리를 지키고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개인의 경험이 아닐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플랫폼의 이면에 가려진 그림자 속에서 땀 흘리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현실의 충격(Reality Shock)으로 다가온 지금,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일’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