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돈을 씁니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 출근길의 교통비, 점심 식사, 저녁의 장보기까지. 돈은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순간에 함께하는 공기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익숙한 돈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만약 어느 날 아침, 어제 5,000원이었던 커피가 10,000원이 되고, 다음 날엔 20,000원이 된다면 어떨까요? 월급은 그대로인데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인플레이션’**이라는, 우리 지갑 속 돈의 가치를 조용히 훔쳐가는 도둑의 소행입니다.
이 글은 돈의 탄생부터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의 등장,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화폐 전쟁까지, 돈을 둘러싼 거대한 역사를 탐험하는 긴 여정입니다. 고대 로마 황제의 꼼수부터 짐바브웨의 100조 달러 지폐까지, 흥미로운 이야기와 사례를 통해 돈의 본질과 그 배신의 역사를 파헤쳐 봅니다. 이 여정이 끝날 때쯤, 여러분은 지갑 속 종이와 숫자를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Part I: 돈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돈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 있나요? 모든 것이 지금보다 단순하고 낭만적일까요? 천만에요. 아마 훨씬 더 피곤하고 비효율적인 세상이었을 겁니다. 돈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돈이 태어나기 전의 세상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1.1. 물물교환, 너무나도 피곤한 거래의 시작
옛날 옛적, 아주 부지런한 농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애지중지 키운 소 한 마리를 시장에 끌고 갔죠. 그의 목표는 소박했습니다. 빵 몇 덩이와 소금 한 줌, 그리고 낡은 신발을 대신할 새 신발 한 켤레를 구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시장은 그의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빵집 주인은 “소 한 마리는 너무 많아요. 전 그냥 닭 한 마리면 되는데…“라고 말합니다. 소금 장수는 “소금은 드릴 수 있지만, 전 지금 땔감이 필요해요.“라고 하죠. 신발 장인은 “훌륭한 소군요! 하지만 제 아내가 생선을 먹고 싶어 해서요.“라며 고개를 젓습니다.
농부는 깊은 한숨을 내쉽니다. 이것이 바로 물물교환 시대의 가장 큰 문제, **‘욕구의 이중적 일치(double coincidence of wants)’**라는 난관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진 상대방이, 동시에 내가 가진 것을 원해야만 거래가 성사되는 아주 까다로운 조건이죠. 결국 농부는 험난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먼저 소를 팔아 땔감을 원하는 사람에게 주고 땔감을 얻습니다. 그 땔감으로 소금 장수에게 가서 소금을 구하고, 다시 다른 사람을 찾아 남은 땔감을 생선으로 바꾼 뒤에야 신발 장인에게 가서 신발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시장을 헤맨 농부는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이 과정은 물물교환의 또 다른 문제점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 나눌 수 없는 가치 (Indivisibility): 살아있는 소를 빵 한 덩이 값만큼 잘라서 줄 수는 없습니다.
- 가치의 기준 부재 (Lack of a Standard Value): 소 한 마리가 빵 몇 개와 같은 가치일까요? 거래할 때마다 이 기준을 새로 흥정해야만 했습니다.
- 보관과 운반의 어려움 (Portability and Storage): 농부는 거래가 성사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거운 소를 계속 끌고 다녀야 했고, 빵집 주인이 덜컥 소를 받는다 해도 소를 보관할 외양간이 없으면 곤란했을 겁니다.
이처럼 물물교환은 너무나도 피곤하고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인류는 이 불편함을 해결할 더 나은 방법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1.2. 세상 모든 것이 돈이 될 수 있다면
물물교환의 불편함 속에서 인류는 첫 번째 해결책을 찾아냅니다. ‘모두가 원하는 물건’을 교환의 중간 다리로 삼는 것이었죠. 이것이 바로 **‘상품화폐(Commodity Money)’**의 시작입니다. 역사 속에서 정말 다양한 물건들이 돈의 역할을 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쌀이나 밀 같은 곡물, 혹은 가축이 그 역할을 했죠. 로마 병사들은 월급(Salary)을 소금(Salt)으로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처럼, 잘 썩지 않고 모두에게 필요한 소금이나 옷감, 가죽 등도 훌륭한 화폐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공적인 상품화폐는 ‘조개껍데기’였습니다. 내륙 지방에서는 구하기 힘든 희귀성과 단단한 내구성, 작은 크기 덕분에 고대 중국을 비롯한 여러 문명에서 널리 사용되었죠. 돈이나 재물을 뜻하는 한자 ‘貝(조개 패)‘가 바로 이 조개껍데기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라는 사실은 상품화폐가 우리 역사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상품화폐의 등장을 통해 우리는 돈이 가져야 할 세 가지 핵심 기능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교환의 매개 (Medium of Exchange):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없애주는 중간 다리 역할.
- 가치의 척도 (Unit of Account): 모든 물건의 가치를 표시하는 기준. “이 소는 쌀 10가마"처럼 말이죠.
- 가치의 저장 (Store of Value): 가치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기능.
하지만 상품화폐 역시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곡물은 썩고, 가축은 병들어 죽을 수 있으며, 소금은 물에 녹아버렸습니다. 여전히 더 나은 돈에 대한 인류의 갈증은 계속되었습니다.
1.3. 반짝이는 것들의 유혹, 금속화폐의 등장
상품화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금, 은, 구리, 철과 같은 금속이었습니다. 금속은 상품화폐가 가진 거의 모든 단점을 해결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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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구성 (Durability): 썩거나 변하지 않아 가치를 영구적으로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 가분성 (Divisibility): 녹여서 작은 단위로 나누어도 가치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 휴대성 (Portability): 작은 부피와 무게로도 높은 가치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 균질성 (Homogeneity): 어디에서 나온 금이든 순도만 같다면 동일한 가치를 가졌습니다.
초기의 금속화폐는 ‘칭량화폐(稱量貨幣)’, 즉 무게를 재서 사용하는 돈이었습니다. 거래할 때마다 저울에 금속 덩어리를 올려 무게를 재고 가치를 계산했죠. 고대 중국에서 사용되었던 칼 모양의 ‘명도전(明刀錢)‘이나 쟁기 모양의 ‘포전(布錢)‘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중국 화폐들은 우리나라 고조선 유적지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 활발한 교역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야 시대에는 덩이쇠(鐵鋌)를 화폐처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4. 신뢰의 증표, 주화의 발명
매번 무게를 재는 것조차 번거로워지자, 인류는 돈의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발명을 해냅니다. 바로 ‘주화(Coin)’, 즉 동전의 탄생입니다. 기원전 650년경, 오늘날 튀르키예 지역에 있던 리디아 왕국은 금과 은의 자연 합금인 ‘일렉트럼’으로 세계 최초의 주화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주화의 핵심은 단순히 금속을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위에 찍힌 **‘왕의 인장’**이었죠.
이 인장은 국가가 이 동전의 무게와 순도를 ‘보증한다’는 약속의 증표였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저울을 들고 다닐 필요 없이 동전의 개수만 세면 되었습니다. 거래의 속도와 신뢰도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상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인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맙니다. 국가가 돈의 가치를 보증하는 순간, 국가는 그 가치를 속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왕의 인장은 신뢰의 상징인 동시에, 훗날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키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돈의 역사는 편리함과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인 동시에, 그 신뢰를 어떻게 배신하고 이용해왔는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돈의 발전 과정은 곧 신뢰를 개인 간의 관계에서 점차 외부의 권위로 위탁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물물교환에서는 거래 당사자 둘만의 신뢰가 필요했지만, 상품화폐는 사회 전체가 특정 물건의 가치를 믿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화의 등장은 그 신뢰를 국가라는 단일 주체에게 집중시켰습니다. 이 ‘신뢰의 아웃소싱’은 거대 경제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국가가 그 신뢰를 저버릴 때 사회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을 잉태한 것이었습니다.
화폐의 역사 요약
시대 | 화폐 형태 | 주요 특징 |
---|---|---|
선사 시대 | 물물교환(Barter) | 욕구의 이중적 일치 필요, 거래 비효율성 |
~B.C. 3000 | 상품화폐(Commodity Money) | 조개껍데기, 곡물 등. 부패, 보관의 문제 |
~B.C. 1000 | 금속화폐(Metallic Money) | 중국의 도전/포전 등. 무게를 재서 사용 |
~B.C. 650 | 최초의 주화(First Coins) | 리디아 왕국. 국가가 무게와 순도를 보증 |
~11세기 | 최초의 지폐(First Paper Money) | 중국 송나라 ‘교자’. 금속 보관증서에서 유래 |
17세기 | 유럽 최초의 은행권 | 스웨덴에서 발행. 금속화폐의 불편함 해소 |
1971년 | 금본위제 폐지(Fiat Era) | 닉슨 쇼크. 금과 연결고리가 끊어진 신용화폐 시대 |
2009년 | 비트코인 탄생 | 정부 없이 작동하는 최초의 디지털 화폐 |
2020년대 | 스테이블코인 & CBDC | 디지털 화폐의 새로운 진화: 가치안정화, 중앙은행의 디지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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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I: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의 탄생
주화의 발명은 상업을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통치자들에게 아주 위험한 유혹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전쟁 비용이 필요하거나, 호화로운 궁전을 짓고 싶을 때, 세금을 더 걷는 것은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동전에 섞는 값싼 금속의 양을 몰래 늘리는 것은 훨씬 쉽고 은밀한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가 주도하는 인플레이션의 시작, 즉 **‘돈의 배신’**이었습니다.
2.1. 로마 황제들의 구리빛 코
우리의 첫 번째 사례는 거대한 상업 제국, 로마에서 시작됩니다. 서기 64년, 로마에 끔찍한 대화재가 발생합니다. 도시의 상당 부분이 잿더미로 변했고, 네로 황제는 웅장한 로마 재건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막대한 재건 비용과 황제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감당할 돈이 부족했습니다.
이때 네로는 교활한 묘책을 생각해냅니다. 바로 **‘화폐의 품질 저하(Debasement)’**입니다. 그는 조폐국에 은화 ‘데나리우스’를 만들 때 은의 함량을 줄이고 값싼 구리를 더 많이 섞으라고 비밀리에 명령합니다.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실제 가치는 떨어진 동전이 탄생한 것이죠. 하지만 법적으로는 예전 은화와 똑같은 가치를 지녔습니다. 네로는 이렇게 만들어낸 ‘가짜 돈’으로 병사들에게 월급을 주고, 재건 사업의 대금을 치렀습니다. 같은 양의 은으로 더 많은 돈을 찍어낸 셈입니다.
이 소식은 금세 시장에 퍼졌습니다. 영리한 로마 시민들은 순도 높은 옛날 은화는 장롱 속에 깊이 숨겨두고, 가치가 떨어진 새 은화만 서둘러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에는 품질 나쁜 돈만 넘쳐나고 좋은 돈은 자취를 감추는 현상, 이것이 바로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유명한 **‘그레샴의 법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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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의 꼼수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수많은 로마 황제들이 재정이 어려울 때마다 이 방법을 따라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은 계속 떨어져, 3세기 중반에는 은 함량이 5%도 채 되지 않는, 사실상 구리 동전에 은칠만 살짝 한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화폐 가치가 계속 떨어지자 물건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로마 경제를 덮친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동전을 믿지 않았고, 세금도 동전 대신 곡물이나 옷감 같은 현물로 내기 시작했습니다. 화폐 경제가 무너지고 물물교환 시대로 퇴보한 것입니다. 301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최고가격령’**을 발표해 모든 물건과 서비스의 가격 상한선을 정하는 극약 처방을 내놓았지만, 결과는 더 나빴습니다. 상인들은 손해를 보면서 물건을 파느니 아예 시장에서 물건을 빼돌렸고, 암시장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결국 이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통화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경제적 혼란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2. 왕의 빚, 왕국의 고통: 헨리 8세의 ‘위대한 평가절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16세기 영국으로 가보겠습니다. 여섯 명의 아내와 영국 국교회 설립으로 유명한 헨리 8세는 프랑스, 스코틀랜드와 잦은 전쟁을 벌였고, 화려한 궁정 생활을 유지하느라 늘 돈에 쪼들렸습니다. 수도원을 해산시켜 그 재산을 몰수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결국 헨리 8세도 로마 황제들과 똑같은 방법을 선택합니다. 1544년부터 그는 **‘위대한 평가절하(The Great Debasement)’**라 불리는 대대적인 화폐 품질 저하 정책을 시작합니다. 은화의 순은 함량을 기존 92.5%에서 불과 25%까지 떨어뜨렸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동전은 헨리 8세에게 **‘구리 코쟁이 영감(Old Coppernose)’**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안겨주었습니다. 새 동전은 구리로 만든 뒤 겉에만 얇게 은을 입혔는데, 동전이 닳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튀어나온 부분인 왕의 초상화 코 부분의 은이 벗겨져 구리 속살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손에 쥔 동전에서 왕의 구리빛 코를 보며 화폐 가치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매일같이 실감해야 했습니다.
결과는 로마와 똑같았습니다. 물가가 폭등하고 경제는 혼란에 빠졌으며, 유럽 대륙에서 영국 화폐의 신용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상인들은 거래할 때마다 영국 동전의 무게를 직접 재보는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희망적인 반전이 있습니다.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그녀는 즉위하자마자 무너진 화폐 제도를 바로잡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1560년, 엘리자베스 1세는 시중에 유통되던 모든 저질 동전을 회수하고, 순도 높은 새로운 은화를 발행하는 대대적인 화폐 개혁을 단행합니다. 이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이 개혁은 영국 화폐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켰고, 이후 영국이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튼튼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 사례는 무너진 화폐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단순한 경제 정책을 넘어, 국가의 명운을 건 정치적 결단임을 보여줍니다. 통치자가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때, 비로소 경제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2.3. 넘쳐나는 은, 폭발하는 물가: 16세기 가격혁명
지금까지 우리는 통치자들이 ‘나쁜 돈’을 만들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사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좋은 돈’이 갑자기 너무 많아져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을까요? 16세기 유럽이 바로 그 거대한 실험실이었습니다.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은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과 같은 거대한 광산을 발견하고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유럽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귀금속들은 스페인을 거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유럽의 화폐 공급량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 결과, 16세기 유럽은 약 150년에 걸쳐 물가가 지속적으로 오르는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을 경험하게 됩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물가가 6배나 치솟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전 처음 겪는 기이한 현상이었습니다. 이전까지 물건 값은 수백 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우리에게 인플레이션의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을 가르쳐줍니다. 바로 **‘화폐수량설(Quantity Theory of Money)’**의 기본 원리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 “시장에 돌아다니는 돈의 양(M)이 살 수 있는 물건과 서비스의 양(T)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나면, 물가(P)는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아메리카에서 쏟아져 들어온 은 때문에 돈의 양은 급격히 늘어났지만, 농업 생산성이나 공산품 생산량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넘쳐나는 돈이 한정된 물건을 뒤쫓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모든 것의 가격이 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플레이션은 통치자의 의도적인 속임수뿐만 아니라, 경제 시스템 전체의 돈의 양과 생산량 사이의 불균형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로마와 헨리 8세의 사례가 전쟁과 같은 **‘재정적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이라면, 가격혁명은 전쟁 자금을 대려는 국가의 필요가 인플레이션을 낳는다는 역사적 패턴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전쟁은 막대한 비용을 요구하고, 세금을 올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며, 돈의 품질을 낮추는 것은 통치자에게 가장 손쉬운 해결책처럼 보입니다. 로마 병사의 월급이 가치를 잃고 영국 상인의 화폐가 해외에서 불신받는 현상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국가가 재정 위기를 국민의 저축에 전가할 때 반복되는 비극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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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II: 종이의 시대: 약속, 문제, 그리고 대혼란
금속화폐는 무겁고 불편했습니다. 특히 큰 거래를 할 때는 수레에 동전을 싣고 다녀야 할 판이었죠. 이러한 불편함은 돈의 역사에서 또 한 번의 혁명, 즉 **‘종이돈’**의 탄생을 이끌었습니다. 이 가볍고 편리한 발명품은 상업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풀어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1. ‘날아다니는 돈’의 발명
종이돈의 고향은 놀랍게도 유럽이 아닌 11세기 중국 송나라였습니다. 당시 쓰촨성 지역 상인들은 무거운 철전을 대량으로 거래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비단 한 필을 사려면 130근(약 80kg)에 달하는 철전을 지불해야 할 정도였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인들은 신용 있는 조합에 철전을 맡기고, 그 증표로 종이 영수증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수증이 바로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交子)’**입니다. 사람들은 무거운 철전 대신 가벼운 교자를 주고받으며 거래했고, 필요할 때 언제든 교자를 들고 가면 철전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즉, 교자의 가치는 그것이 **‘언제든 금속화폐로 교환될 수 있다는 약속’**에 기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태환지폐(Convertible Currency)’**의 핵심 원리입니다.
이 편리한 발명품은 곧 정부에 의해 공식 화폐로 채택되었고, 훗날 원나라 시대에는 마르코 폴로 같은 서양인들에게 큰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유럽에서는 이보다 훨씬 늦은 17세기 스웨덴에서 비슷한 필요성 때문에 은행권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3.2. 하이퍼인플레이션이라는 지옥도
태환지폐의 시대는 ‘약속’이 지켜지는 한 평화로웠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그 약속을 어기고, 보관된 금이나 은보다 훨씬 많은 양의 종이돈을 찍어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지옥의 문이 열립니다.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물가가 폭등하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이죠. 역사는 우리에게 그 끔찍한 사례들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Case Study 1: 바이마르 공화국의 눈물 (1921-1923)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승전국에게 천문학적인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와 벨기에가 배상금 지급 지연을 빌미로 독일의 공업 중심지인 루르 지역을 점령하자, 독일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소극적 저항’, 즉 파업을 지시하고 그들의 임금을 정부가 대신 지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세금 수입은 끊기고 지출만 늘어나는 상황에서, 독일 정부가 선택한 방법은 단 하나, 윤전기를 돌려 돈을 찍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빚을 돈으로 갚는 **‘부채의 화폐화(monetization of debt)’**였습니다.
그 결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경제 재앙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 상상을 초월하는 물가 상승: 1921년 0.3마르크였던 신문 한 부 가격이 2년 뒤인 1922년 11월에는 7,000만 마르크로 2억 배 넘게 폭등했습니다.
- 돈의 가치 소멸: 사람들은 월급을 하루에 두 번씩 받아, 받자마자 상점으로 달려가 물건을 사재기했습니다. 몇 시간만 지나도 돈이 휴지 조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다발을 손수레에 싣고 다녔고, 지폐가 벽지나 땔감보다 싸져 실제로 그렇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 중산층의 붕괴: 평생 모은 예금과 연금이 하루아침에 무가치해지면서 독일의 중산층은 완전히 붕괴했습니다. 이들의 절망과 분노는 사회를 극단으로 몰고 갔고, 결국 히틀러와 나치당이 득세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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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옥 같은 혼란은 1923년 11월, **‘렌텐마르크(Rentenmark)’**라는 새로운 화폐를 도입하면서 마침내 멈췄습니다. 금이 없었던 독일은 국가의 모든 토지와 산업 자산을 담보로 렌텐마르크를 발행했고, 동시에 돈 찍어내기를 완전히 중단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습니다. 이는 화폐의 가치는 결국 **‘신뢰’**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 이른바 **‘렌텐마르크의 기적’**으로 불립니다.
Case Study 2: 역사상 최악의 인플레이션들
바이마르 공화국의 비극은 유일한 사례가 아니었습니다. 역사는 더 끔찍한 기록들을 남겼습니다.
- 헝가리 (1946):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헝가리는 역사상 가장 빠른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었습니다. 물가가 단 15시간마다 두 배씩 치솟았고, 정부는 ‘0’이 20개나 붙은 1해(垓) 펭괴 지폐까지 발행했습니다. 원인은 바이마르와 비슷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 막대한 배상금, 그리고 정부의 무분별한 화폐 발행이었죠. 헝가리 역시 ‘포린트’라는 새 화폐를 도입하고 금본위제로 복귀하는 화폐 개혁을 통해 혼란을 수습했습니다.
- 짐바브웨 (2000년대): 가장 최근의 비극적 사례입니다.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의 독재와 실패한 토지개혁 정책으로 농업 생산이 붕괴하자, 정부는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돈을 찍어냈습니다. 그 결과, 100조 짐바브웨 달러 지폐가 등장했지만, 이 돈으로는 달걀 몇 개도 사기 힘들었습니다. 버스 요금은 아침과 저녁이 달랐고, 사람들은 자국 화폐를 버리고 미국 달러를 암암리에 사용했습니다. 결국 2009년, 짐바브웨 정부는 자국 통화 포기를 선언하고 미국 달러를 공식 통화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Case Study 3: 조선의 교훈, 당백전 (1866)
이러한 교훈은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19세기 조선,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 중건이라는 거대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그는 **‘당백전(當百錢)’**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합니다. 이름 그대로 기존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를 지닌 고액권이었죠. 하지만 실제 구리 함량은 5~6배에 불과했습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습니다. 사람들은 가치가 높은 상평통보를 숨기고 가치가 낮은 당백전만 사용했고(그레샴의 법칙), 시중에 돈이 넘쳐나자 물가가 폭등했습니다. 당백전 발행 후 불과 2년 만에 쌀값은 6배나 치솟았습니다. 극심한 혼란과 백성들의 원성에 부딪힌 대원군은 결국 6개월 만에 당백전 유통을 금지해야 했습니다.
하이퍼인플레이션 비교
구분 |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 | 헝가리 | 짐바브웨 |
---|---|---|---|
기간 | 1921-1923년 | 1945-1946년 | 2007-2009년 |
월간 최고 물가상승률 | 29,500% | 4.19 x 10¹⁶% | 7.96 x 10¹⁰% |
물가 2배 상승 시간 | 3.7일 | 15시간 | 24.7시간 |
최고액권 | 100조 마르크 | 1해(10²⁰) 펭괴 | 100조 달러 |
주요 원인 | 전쟁 배상금, 재정 적자 | 전쟁 피해, 배상금 | 정치적 실패, 재정 적자 |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단순히 물가가 오르는 경제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의 신뢰 시스템 전체를 파괴하는 재앙입니다. 돈이 휴지 조각이 되면, 사람들은 저축을 포기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없게 되며, 사회는 서로를 불신하게 됩니다. 헝가리에서는 사람들이 코트나 부츠를 들고 농촌으로 가 밀과 바꾸는 등 물물교환 시대로 회귀했습니다. 바구니 속 돈보다 바구니 자체가 더 비싸 강도가 돈은 버리고 바구니만 훔쳐가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는 돈의 가치를 보증해야 할 국가가 그 약속을 완전히 저버렸을 때, 사회가 얼마나 원시적인 상태로 퇴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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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V: 현대 금융 시스템의 미로
두 번의 세계대전과 끔찍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은 후, 세계는 좀 더 안정적인 통화 시스템을 갈망했습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한 현대 금융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 역시 인플레이션이라는 오랜 숙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금과의 완전한 이별, 그리고 스태그플레이션과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통해 돈의 역사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4.1. 금과의 이별: 닉슨 쇼크와 신용화폐의 시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4년, 연합국 대표들은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튼 우즈에 모여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를 논의합니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브레튼 우즈 체제’**입니다. 이 체제의 핵심은 미국 달러를 금에 고정시키고(금 1온스 = 35달러), 다른 국가들의 통화는 다시 미국 달러에 고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달러를 매개로 전 세계가 간접적으로 금본위제에 묶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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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스템은 한동안 잘 작동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미국이 ‘위대한 사회’ 건설이라는 막대한 복지 지출과 베트남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보유한 금보다 훨씬 많은 양의 달러를 찍어내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달러의 가치를 의심하게 된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들이 자국이 보유한 달러를 들고 와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금고는 빠르게 비어갔습니다.
결국 1971년 8월 15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폭탄선언을 합니다.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닉슨 쇼크’**입니다. 이 선언으로 달러와 금의 연결고리는 끊어졌고, 브레튼 우즈 체제는 붕괴했습니다.
이 사건은 돈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입니다. 인류의 화폐는 금이라는 실물 자산의 족쇄에서 완전히 풀려나, 오직 그것을 발행하는 정부의 **‘신용’**과 **‘약속’**에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환지폐(Fiat Money)’, 즉 신용화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순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돈은 바로 이 신용화폐입니다. 그 가치는 종이나 숫자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정부와 중앙은행이 그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 믿음이 깨질 때, 바이마르 공화국의 비극이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습니다.
4.2. 멈춰버린 성장, 치솟는 물가: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금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1970년대, 세계 경제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경기는 침체되어 실업률은 치솟는데, 물가까지 함께 폭등하는 최악의 조합, 바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입니다. 당시 주류 경제학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외부에서 온 충격, 즉 **‘공급 쇼크(Supply Shock)’**였습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석유를 무기화하여 원유 가격을 4배나 인상하고 수출을 줄여버립니다. 전 세계 산업의 혈액과도 같은 석유 가격이 폭등하자, 공장의 생산 비용, 트럭의 운송 비용 등 모든 비용이 급증했습니다. 이는 기업들이 제품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비용인상 인플레이션(Cost-push Inflation)’**을 촉발했습니다.
이는 16세기 가격혁명처럼 수요가 넘쳐나서 물가가 오르는 ‘수요견인 인플레이션(Demand-pull Inflation)‘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문제였습니다. 정부가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려 하면 물가가 더 치솟고, 물가를 잡기 위해 돈줄을 죄면 경기가 더 얼어붙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이 기나긴 악몽을 끝낸 인물은 1979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였습니다. 그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꺾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기준금리를 무려 **20%**까지 끌어올리는 초강수를 둡니다. 이것이 **‘볼커 쇼크(Volcker Shock)’**입니다. 이 충격으로 미국 경제는 깊은 침체에 빠지고 실업률이 급등하는 고통을 겪었지만, 마침내 끈질겼던 인플레이션의 불길을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볼커의 결단은 신용화폐 시대에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물가 안정에 대한 신뢰’**를 지키는 것임을, 그리고 그 신뢰를 위해서는 때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함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4.3. 팬데믹의 후유증: 2021-2023년 인플레이션 논쟁
가장 최근, 우리 모두는 팬데믹이 불러온 인플레이션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이는 마치 한 편의 거대한 경제 추리극과도 같았습니다. 범인은 누구였을까요?
- 용의자 #1: 공급망 대혼란. 2020년,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치자 공장들이 멈추고 항구가 폐쇄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상품을 만들고 운송하는 글로벌 공급망이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물건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죠. 여기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에너지와 곡물 가격을 폭등시키며 기름을 부었습니다.
- 용의자 #2: 돈의 쓰나미. 팬데믹으로 멈춰선 경제를 살리기 위해 각국 정부는 막대한 돈을 풀었습니다. 미국은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했고, 중앙은행들은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추며 시중에 유동성을 쏟아부었습니다. 이렇게 풀린 돈은 소비자들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 강력한 수요를 만들어냈습니다.
범인은 누구인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공급망 문제만 해결되면 물가는 저절로 안정될 것"이라 주장하는 ‘일시적(Transitory) 인플레이션’ 파와, “정부가 너무 많은 돈을 풀어 생긴 문제이므로 강력한 긴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구조적(Permanent) 인플레이션’ 파가 맞섰습니다.
결론적으로, 범인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수요(돈의 쓰나미)가 마비된 공급망을 덮친 ‘복합 범죄’**였던 셈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풀린 돈은 은행 시스템에 머물며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자산 가격을 부풀리는 **‘자산 인플레이션’**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팬데믹 때 풀린 돈은 사람들의 주머니로 직접 들어가 우리가 매일 사는 상품과 서비스 가격을 밀어 올리는 **‘소비자물가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경험은 현대 금융 시스템이 얼마나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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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V: 당신의 지갑은 어디로 가는가?
로마의 데나리우스에서 21세기의 디지털 코드에 이르기까지, 돈은 끊임없이 진화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부와 중앙은행이 독점하던 화폐 발행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기술이 그 패권에 도전하는 거대한 전환기 앞에 서 있습니다. 암호화폐의 반란, 중앙은행의 반격, 그리고 우리가 마주할 새로운 인플레이션의 위협까지. 미래의 돈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리고 우리의 지갑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요?
5.1. 디지털 시대의 반란: 암호화폐
2008년, 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는 기존 금융 시스템에 대한 깊은 불신을 낳았습니다. 바로 이 혼란 속에서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익명의 프로그래머가 비트코인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비트코인은 정부나 중앙은행 같은 중앙 관리자 없이, 암호학 기술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최초의 탈중앙화 디지털 화폐였습니다. 이는 국가의 **‘신뢰’**가 아닌, 코드의 **‘증명’**에 기반한 새로운 화폐 시스템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의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
비트코인 지지자들은 총발행량이 2,100만 개로 고정된 비트코인이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법정화폐의 대안, 즉 **‘디지털 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화폐 가치가 떨어질 때, 비트코인이 우리의 자산을 지켜줄 수 있다는 희망이죠.
하지만 현실은 복잡합니다. 비트코인은 극심한 가격 변동성 때문에 안정적인 가치 저장 수단이나 교환의 매개 역할을 하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오늘 1 비트코인으로 자동차 한 대를 살 수 있었는데, 내일은 자전거 한 대밖에 못 살 수도 있는 화폐를 일상생활에서 쓰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실제 사례에서 배우는 교훈
- 엘살바도르의 실험: 2021년, 엘살바도르는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하는 대담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국민 대다수는 비트코인 사용에 익숙하지 않았고, 기술적 문제와 정부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극심한 가격 변동성 때문에 실제 사용률은 매우 저조한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빈곤층에게는 하루아침에 가치가 반 토막 날 수 있는 비트코인은 월급으로 받기엔 너무 위험한 자산이었습니다.
- 아르헨티나와 튀르키예의 선택: 반면, 자국 화폐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무너지고 있는 아르헨티나와 튀르키예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이들 국가의 국민들은 자산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심정으로 암호화폐를 찾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이 선택한 것은 비트코인보다는 미국 달러에 가치가 고정된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인 USDT나 USDC입니다. 이는 투기 목적이 아니라, 가치가 폭락하는 자국 화폐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디지털 달러화’ 현상입니다. 현대판 그레샴의 법칙이 디지털 세상에서 펼쳐지고 있는 셈입니다.
5.2. 중앙은행의 반격: CBDC의 등장
암호화폐의 도전에 직면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들도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들의 대응책이 바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CBDC)’**입니다. CBDC는 쉽게 말해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법정화폐입니다.
장점과 우려
CBDC는 현금 발행 및 관리 비용을 줄이고, 결제 시스템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며,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들도 금융 시스템에 쉽게 접근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CBDC는 중앙은행에게 전례 없는 강력한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는 우려도 큽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모든 국민의 CBDC 계좌로 직접 재난지원금을 쏘아줄 수도 있고, 경기 침체 시에는 사람들의 저축에 **‘마이너스 금리’**를 부과해 억지로 돈을 쓰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또한, 모든 거래 기록이 중앙은행 서버에 남게 되므로, 국가가 개인의 모든 경제 활동을 감시할 수 있다는 심각한 프라이버시 문제도 제기됩니다.
5.3. 21세기의 새로운 과제들
미래의 인플레이션은 암호화폐나 CBDC 같은 기술적 변화뿐만 아니라, 더 거대한 구조적 변화의 영향도 받게 될 것입니다.
- 탈세계화(Deglobalization):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중국 등에서 생산된 저렴한 상품 덕분에 낮은 물가를 누려왔습니다. 하지만 미중 갈등과 팬데믹을 거치면서 효율성보다 안보를 중시하는 ‘탈세계화’ 또는 ‘슬로벌라이제이션(Slowbalization)’ 흐름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생산 기지가 자국이나 인접국으로 돌아오면서 생산 비용이 높아지고, 이는 장기적인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 그린플레이션(Greenflation):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녹색 전환’**도 새로운 인플레이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전기차 배터리에 필수적인 리튬, 니켈이나 신재생에너지 설비에 필요한 구리 등의 핵심 광물 수요는 폭증하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면서 가격이 급등하는 현상입니다. 친환경 경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치러야 할 비용이 물가 상승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 인구 구조의 변화(Demographics): 고령화 역시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칩니다.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노동 인구는 줄어드는데(임금 상승 압력), 은퇴 후 저축한 돈을 쓰는 고령 인구는 늘어납니다(소비 수요 증가). 이는 장기적으로 노동력 부족과 수요 증가를 동시에 유발하여 물가를 밀어 올리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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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결국 모든 것은 신뢰의 문제
조개껍데기에서 시작해 금속 주화와 종이 지폐를 거쳐,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 코드에 이르기까지, 돈의 형태는 끊임없이 변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기나긴 여정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핵심 가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신뢰’**입니다.
우리는 물건의 내재된 가치를 믿었고, 왕의 인장을 믿었으며, 금으로 바꿔주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저 정부와 중앙은행이 화폐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해 줄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믿음 하나로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인플레이션은 그 신뢰가 흔들리거나 깨졌을 때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증상입니다. 통치자의 탐욕, 전쟁의 광기, 정치적 무능, 혹은 예측 불가능한 재앙 앞에서 돈은 언제나 우리를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돈의 가치가 결코 영원하거나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줍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거대한 전환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비트코인은 국가 대신 알고리즘을 신뢰하자고 외치고, CBDC는 국가가 그 신뢰를 디지털 영역에서 더욱 공고히 하겠다고 말합니다. 탈세계화와 기후 변화, 인구 고령화는 우리가 알던 경제의 법칙들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 혼돈의 시대에, 당신의 지갑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누구를 신뢰하시겠습니까? 그 선택이 미래의 부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물물교환부터 비트코인까지 화폐의 역사와 미래 - 모바일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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