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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동본 금혼, 법이 사랑을 금지했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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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간 이어진 동성동본 금혼법은 어떻게 시작되고 사라졌을까?

  • 신라·고려 왕실이 정치적 목적으로 근친혼을 활용한 이유
  • 조선 시대에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동성동본 금혼’ 제도가 탄생한 배경
  • 현대 사회에서 동성동본 금혼법이 개인의 자유와 충돌하며 폐지되기까지의 과정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법이 가로막는다면 어떨까요? 황당한 상상 같지만, **동성동본(同姓同本)**이라는 이유로 수만 쌍의 연인들이 고통받았던 것은 불과 수십 년 전 대한민국의 현실이었습니다. 이 글은 피와 권력, 사랑과 금기가 뒤얽힌 한반도 혼인 제도의 길고 험난했던 여정을 따라갑니다.

왕권을 위한 도구, 신라와 고려의 근친혼

천 년 가까이 한반도에서 가까운 친족과의 결혼은 금기가 아닌, 권력을 지키는 핵심 전략이었습니다. 신라와 고려 왕실은 왜 조카, 사촌, 심지어 이복남매와 혼인해야만 했을까요?

신라의 성골, 혈통 유지를 위한 극단적 선택

신라의 역사는 **골품제(骨品制)**라는 엄격한 신분제에서 시작합니다. ‘뼛속의 등급’이라는 의미처럼, 혈통의 순수성이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 정점에는 부모 양쪽 모두 왕족이어야 하는 **성골(聖骨)**이 있었습니다.

이 폐쇄적인 시스템은 그 자체로 ‘황금 우리’였습니다. 성골 신분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성골 내에서만 결혼해야 했고, 이는 선택의 폭을 극도로 제한했습니다. 결국 신라 왕실의 근친혼은 신성한 혈통에 대한 믿음 이전에, 스스로 만든 제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이고도 극단적인 해법이었습니다.

  • 진흥왕: 법흥왕의 동생(입종 갈문왕)과 딸(지소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외삼촌과 조카 사이의 결혼이었죠.
  • 김유신과 김춘추: 김유신은 여동생 문희를 김춘추에게 시집보냈고, 훗날 그들의 딸과 결혼해 김춘추의 처남이자 사위가 되었습니다.

울주 천전리 각석. 신라 시대 왕족의 생활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왕자와 누이의 사랑 이야기도 이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울주 천전리 각석. 신라 시대 왕족의 생활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왕자와 누이의 사랑 이야기도 이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 선택은 유럽 합스부르크 왕가처럼 유전적 취약성과 왕위 계승의 혼란을 야기하며, 신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 결국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 셈입니다.

고려의 묘수, 외척 견제를 위한 새로운 전략

918년 건국된 고려는 다른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태조 왕건은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29명의 부인을 두었고, 이는 수많은 외척 세력이 왕권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때 고려 왕실은 신라의 ‘낡은 전략’을 ‘새로운 묘수’로 재활용합니다. 바로 왕실 내부의 근친혼을 통해 외부 세력(호족)이 왕의 장인이 되어 권력을 잡는 길을 원천 차단한 것입니다. 이는 기존 제도를 당대의 정치 상황에 맞게 영리하게 변용한 탁월한 사례였습니다.

고려 4대 왕 광종은 자신의 이복누이인 대목왕후 황보씨와 결혼하며 이 전략을 본격화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신라의 풍습을 따른 것이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 재산 유출을 막으려는 치밀한 정치·경제적 계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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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주요 근친혼 사례 (관계)목적 및 배경
신라진흥왕 부모 (외삼촌-조카)골품제: ‘성골’ 혈통 순수성 유지
신라김유신 & 지소부인 (외삼촌-조카)정치적 결속 강화 (가야-신라 왕족)
고려광종 & 대목왕후 (이복남매)정치적 절연: 호족 세력의 왕실 개입 차단
고려경종 & 헌애/헌정왕후 (사촌)권력 집중: 태조 직계 후손 내 권력 공고화

거대한 전환: 동성동본 금혼법의 탄생

천 년간 이어진 관습은 고려 말,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면서 거대한 전환을 맞습니다. 어제의 전략이 오늘의 죄악으로 규정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리학의 칼날, 가족을 다시 그리다

성리학은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와 ‘예(禮)‘를 강조했습니다. 이 새로운 사상의 눈에 고려 왕실의 근친혼은 야만적 풍습일 뿐이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은 이를 맹렬히 비판했고, 혼인은 왕권 강화라는 ‘실용’이 아닌 ‘도리’, 즉 성리학적 윤리에 부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세종대왕은 “왕씨(고려)가 500년 만에 후사가 끊긴 이유가 혹 근친혼에 있는 게 아닐까"라고 말하며 바뀐 시대정신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부계 혈통의 추상적 순수성이라는 가치가 가족의 정의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세계에 없던 법, 족보와 동성동본

조선은 중국의 『대명률』을 받아들여 같은 성씨끼리 결혼을 금지하는 ‘동성불혼(同姓不婚)‘을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조와 발상지를 나타내는 **‘본관(本貫)’**이라는 한반도 고유의 개념을 결합해 ‘동성동본 금혼’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창시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법률 개정이 아닌, 거대한 사회 공학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법은 부계 중심 가문(문중)의 지위를 절대화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성과 본관, 그리고 그 뿌리를 증명해야만 결혼할 수 있었기에, 족보(族譜)가 폭발적으로 보급되었습니다.

동성동본 금혼 제도는 부계 혈통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는 가문의 계보를 기록한 ‘족보’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성동본 금혼 제도는 부계 혈통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는 가문의 계보를 기록한 '족보'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이어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족보의 변화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아들딸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했지만, 17세기 이후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아들을 먼저 기록하는 ‘선남후녀(先男後女)’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족보는 역사를 기록하는 책에서, 부계 혈통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사회적 무기가 된 것입니다.

현대의 충돌: 사랑이 동성동본 법을 무너뜨리다

수백 년간 이어진 거대한 관습은 20세기,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라는 새로운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법 밖에 살았던 연인들의 눈물

조선의 관습이었던 동성동본 금혼은 놀랍게도 1960년 시행된 대한민국 민법 제809조 제1항으로 이어졌습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동성동본 간의 만남이 잦아졌지만, 그들은 법적으로 부부가 될 수 없었습니다. 태어난 아이들은 ‘혼외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모든 사회 시스템에서 차별받았습니다. 저 역시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같은 김씨는 결혼 못 한다’는 말을 듣고 막연한 궁금증을 가졌던 기억이 납니다.

법과 현실의 괴리가 커지자, 정부는 1978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1년간 임시로 혼인신고를 허용하는 ‘특례법’을 시행해야 했습니다. 이는 국가 스스로 법의 모순을 인정한 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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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법이 무너지던 날

마침내 1997년, 8쌍의 부부가 민법 제809조 제1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며 역사의 클라이맥스가 시작되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전통적 가치와 개인의 자유라는 두 세계관이 충돌하는 역사적 무대가 되었습니다.

  • 존속 주장 (유림 측): “동성동본은 한 가족이다. 법이 폐지되면 미풍양속과 사회 윤리가 무너진다.”
  • 폐지 주장 (여성계, 당사자 측):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존엄성, 행복추구권, 혼인의 자유를 침해한다.”

1997년 7월 16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동성동본 금혼 제도가 개인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1997년 7월 16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동성동본 금혼 제도가 개인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1997년 7월 16일, 헌법재판소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법이 헌법에 위배되지만, 즉시 폐지할 경우의 혼란을 막기 위해 국회가 개정할 때까지 시한부 생명을 인정한 절묘한 해법이었습니다. 이는 낡은 세계관의 ‘협상된 항복’이자, 우리 사회가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갈 시간을 벌어준 역사적 결정이었습니다.

결론

한반도의 혼인 제도는 권력, 사상, 그리고 개인의 삶이 얽히며 실로 길고 험난한 여정을 거쳐왔습니다. 이 기나긴 드라마의 핵심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전략으로서의 혼인: 신라와 고려 시대의 근친혼은 혈통 보존과 외척 견제라는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전략’이었습니다.
  2. 이념으로서의 혼인: 조선 시대 동성동본 금혼법은 성리학적 이념이 만든 독특한 사회 규범으로, 부계 중심 질서를 강화했습니다.
  3. 권리로서의 혼인: 현대에 이르러 혼인은 가문의 전통보다 개인의 자유와 행복추구권이라는 ‘권리’의 관점에서 재정의되었습니다.

2005년, 동성동본 금혼 조항은 완전히 폐지되고 ‘8촌 이내 혈족’ 간 혼인을 금지하는 합리적인 기준으로 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조차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8촌 이내 금혼’ 규정 역시 세계적 기준에 비해 넓다는 비판 속에 또 다른 헌법소원이 제기된 상태입니다.

가족과 전통, 도덕의 개념은 결코 고정불변이 아닙니다. 현재 논의되는 ‘8촌 이내 금혼’ 규정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참고자료
#동성동본#근친혼#혼인제도#헌법재판소#민법809조#가족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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