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음모론을 넘어, 국가 기밀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 속에서 태어난 ‘보이지 않는 정부’ 이야기입니다.
- ‘딥스테이트’ 서사의 역사적 기원과 현대적 변천 과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사람들이 음모론을 믿게 되는 심리적, 사회적 요인을 분석합니다.
- 미국과 한국의 사례 비교를 통해 ‘보이지 않는 정부’ 개념의 실체에 접근합니다.
두 개의 정부, 그리고 ‘딥스테이트’
1964년,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와이즈와 토머스 로스는 저서 『보이지 않는 정부』에서 “오늘날 미국에는 두 개의 정부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문장은 민주주의의 그림자 속에서 활동하는 강력한 비밀 국가 안보 기구, 즉 오늘날 우리가 **딥스테이트(Deep State)**라고 부르는 개념의 핵심을 꿰뚫습니다. 이 글은 ‘딥스테이트’ 서사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국가 기밀주의와 민주주의 원칙 사이의 실제 긴장 관계에서 태어난 복합적인 현상임을 탐구합니다.
이 서사는 중앙정보국(CIA)에 대한 구체적 비판에서 시작해, 시간이 흐르며 강력한 정치적 무기로 변질되었습니다. 이 글은 그 기원부터 이념적 변형, 그리고 확산을 추동하는 심리적·기술적 요인까지 추적합니다. 특히 미국과 대한민국의 사례를 비교 분석하며, ‘보이지 않는 국가’라는 개념의 다층적 실체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제1부: 딥스테이트 이론의 창세기 - CIA와 『보이지 않는 정부』
냉전 시대의 그림자
‘보이지 않는 정부’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미국이 소련이라는 위협에 맞서면서, CIA와 같은 거대한 비밀 정보 기구가 의회나 대중의 감시가 거의 미치지 않는 곳에서 전례 없는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단순 정보 수집을 넘어, 전 세계에서 비밀 공작, 정권 전복 등을 수행하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정부』의 핵심 주장 (1964)
와이즈와 로스의 책은 후대 음모론과 달리 CIA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불량 조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핵심은 대통령과 소수 자문 그룹이 설정한 큰 틀 안에서, CIA가 현장에서 사건을 만들고 정책에 영향을 미칠 상당한 자율성을 지녔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국무부를 우회하는 비밀 외교 정책의 존재를 폭로한 것이며, CIA의 비밀 공작에 대한 언론의 침묵을 깬 기념비적인 저작이었습니다.
CIA의 과민 반응: 스스로 예언을 실현하다
CIA는 이 책의 출간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출판을 막으려 시도하고, 초판 전량을 사들일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실패하자 언론계 ‘자산’을 동원해 비판적인 서평을 유도했습니다.
이러한 CIA의 과민 반응은 ‘스트라이샌드 효과’를 낳았습니다. 법적으로 문제없는 저널리즘을 국가 안보 위협으로 취급함으로써, CIA는 강력하고 책임지지 않는 비밀 정부에 대한 대중의 의심을 스스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결국 CIA의 행위는 책을 단순 탐사 보도물에서 음모론의 기초 텍스트로 변모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제2부: ‘보이지 않는 정부’에서 ‘딥스테이트’로의 진화
용어의 전환과 정파적 수용
오늘날의 ‘딥스테이트’라는 용어는 1990년대 터키의 ‘데린 데블레트(derin devlet)’, 즉 군부와 안보 기관 내 비밀 네트워크를 지칭하던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용어는 전직 공화당 의회 보좌관 마이크 로프그렌을 통해 미국에 소개되었습니다. 그의 개념은 초당파적 비판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딥스테이트를 비밀 음모 집단이 아닌, 정부 기관, 로비스트, 기업·금융 이익 집단 간의 공생적 네트워크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트럼프 행정부 시기, 선출된 대통령의 의제를 방해하는 ‘불량’ 관료 집단이라는 정파적 무기로 변질되었습니다. 초기의 비판이 민주적 감독이 부재한 ‘비밀 국가(CIA)‘를 향했다면, 현대의 서사는 ‘공적 국가(정부 기관)’ 자체를 적으로 규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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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정점: 큐어넌(QAnon)
큐어넌은 ‘딥스테이트’ 서사가 극단적으로 변이한 형태입니다. 큐어넌의 세계관에서 딥스테이트는 사탄을 숭배하는 소아성애자들의 글로벌 음모 집단이며, 도널드 트럼프는 그들에 맞서는 구원자로 묘사됩니다. 이 서사는 2021년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 같은 현실 정치 폭력에 이념적 정당성을 부여하기까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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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딥스테이트를 믿는 심리: 우리는 왜 음모론에 끌리는가?
음모론에 대한 믿음은 비합리적인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심리에 뿌리를 둡니다.
세 가지 핵심 심리 동기
- 인식적 동기 (알고 싶은 욕구): 복잡한 세상에 단순하고 명확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 실존적 동기 (통제하고 싶은 욕구): 비난할 적을 명확히 하여 통제감을 줍니다.
- 사회적 동기 (소속되고 싶은 욕구): ‘특별한 지식’을 공유하며 집단 정체성을 강화합니다.
인지적 함정과 편향
- 비례성 편향: 큰 사건에는 반드시 큰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 확증 편향: 자신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용.
- 착각적 패턴 인식: 관련 없는 사건들을 연결하여 의도를 찾아냄.
디지털 증폭기: 소셜 미디어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사용자 참여를 극대화하기 위해 감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우선 노출합니다. 이 과정에서 비슷한 생각만 접하는 **‘반향실(echo chambers)’**과 **‘필터 버블(filter bubbles)’**이 형성되어 음모론을 증폭시킵니다. 저 역시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만 보다 보면 생각의 폭이 좁아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이 투명하지 않다는 점 자체가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듭니다.
표 3.1: 음모론 믿음의 핵심 심리적 동인
요인 유형 | 동인/편향 | 정의 |
---|---|---|
동기 | 인식적 동기 | 세상에 대한 지식, 확실성, 그리고 일관된 이해에 대한 욕구. ‘딥스테이트’는 복잡한 정치 사건에 대해 단일하고 포괄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
동기 | 실존적 동기 | 자신의 환경에 대한 안전, 안보, 그리고 통제감에 대한 욕구. 비밀 음모 집단을 식별했다고 믿음으로써 통제감을 회복한다. |
동기 | 사회적 동기 | 자신과 자신이 속한 내집단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욕구. ‘우리’는 진실을 보는 애국자, ‘그들’은 부패한 ‘딥스테이트’ 기득권층이다. |
인지 편향 | 비례성 편향 | 큰 사건에는 큰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가정. 팬데믹이나 선거 결과가 거대한 음모의 결과라고 믿는 것이 더 만족스럽다. |
인지 편향 | 확증 편향 | 기존 믿음을 확인하는 정보만 선호. 반대 증거는 ‘가짜 뉴스’로 치부한다. |
인지 편향 | 착각적 패턴 인식 | 무작위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인식. 관련 없는 사건들을 연결해 조직적인 ‘딥스테이트’ 계획의 증거로 삼는다. |
제4부: 한국의 딥스테이트 - ‘그림자 정부’와 정치적 양극화
‘그림자 정부’ 개념은 한국의 극심한 양극화 속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무기화되었습니다. 이는 ‘딥스테이트’ 서사가 어떤 사회든 적용 가능한 ‘적의 원형(enemy template)‘으로 기능함을 보여줍니다.
- 보수/우파의 서사: 정치적 반대파, 노조, 시민 단체를 국가 안보를 저해하는 종북, 반(反)국가 ‘그림자 정부’로 규정합니다.
- 진보/좌파의 서사: 검찰, 보수 언론, 재벌 등으로 구성된 ‘기득권 카르텔’이 개혁에 저항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대립하는 음모론은 정치적 이견을 선과 악의 대결로 변질시키고, 사회적 불신과 분열을 심화시킵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의 갈등 이면에 정말 거대한 ‘그림자 정부’가 작동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미국과 한국의 딥스테이트 서사 비교
구분 | 미국 ‘딥스테이트’ | 한국 ‘그림자 정부’ |
---|---|---|
핵심 주체 | 정보기관, 직업 관료, 금융 엘리트 | (진영에 따라) 종북 세력 vs 기득권 카르텔 |
주요 비판 대상 |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국가 권력 | 정치적 반대 진영 전체 |
특징 | 초기에는 초당파적 비판 → 점차 극우적, 정파적 서사로 변질 | 처음부터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의 도구로 활용 |
궁극적 목표 | (주장) 선출된 권력의 전복 | (주장) 체제 전복 vs 개혁 방해 |
제5부: 딥스테이트의 실체 - 사실과 음모의 경계
음모론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정부의 실제 기만과 비밀주의의 역사가 그 기반이 됩니다. CIA의 MKUltra 프로젝트, 워터게이트, 이란-콘트라 사건 등은 정부가 실제로 음모를 꾸미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증명하며 **‘신뢰 격차(Credibility Gap)’**를 만들었습니다.
사례 1: JFK 암살 - 살인이 아닌 은폐의 음모
미 하원 암살조사위원회는 CIA가 케네디 암살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기밀 해제된 문서들은 CIA가 암살범 오스왈드를 사전에 감시했음에도 관련 정보를 워런 위원회에 의도적으로 숨겼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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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의 ‘음모’는 대통령 살해 음모가 아니라, 기관의 정보 실패를 은폐하고 조직을 보호하려는 관료주의적 자기 보존의 음모였습니다. 이 은폐가 수십 년간 더 큰 음모론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사례 2: 피터 데일 스콧의 연구 - 비판과 음모의 경계
피터 데일 스콧의 연구는 정당한 비판과 음모론의 경계를 보여줍니다. 그는 CIA가 비밀 공작을 위해 마약 밀매업자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등, “심층 정치(deep politics)“의 충격적인 패턴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통킹만 사건이나 9/11 테러 같은 사건들을 ‘딥스테이트’ 세력이 조작했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기록된 역사에서 음모론적 추론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표 5.1: 주요 사건의 사실과 음모론 구분
사건 | 확립된 역사적 사실 | ‘딥스테이트’ 음모론 주장 |
---|---|---|
JFK 암살 (1963) | CIA는 오스왈드를 감시했고 관련 정보를 워런 위원회에 숨겼다. 정보 실패를 은폐했다. | CIA가 기관 해체를 막기 위해 케네디 암살을 조종했다. |
이란-콘트라 사건 (1985-87) | 레이건 행정부가 법을 위반하며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자금으로 니카라과 반군을 지원했다. | 이는 대통령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불량 ‘딥스테이트’의 증거다. (사실은 행정부 고위층이 주도한 음모) |
9/11 테러 (2001) | 알카에다의 공격. 미국 정보기관들은 정보 조각들을 연결하는 데 실패했다. | 미국 정부(‘딥스테이트’)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한 ‘위장술책(false flag)’ 작전이다. |
결론: 보이지 않는 정부, 그 끝나지 않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정부’ 서사는 국가 안보를 위한 비밀주의와 민주적 책임성이라는, 실제적이고 해결되지 않은 긴장 관계에 뿌리를 둔 강력한 정치적 신화입니다.
- 핵심 요약 1: ‘딥스테이트’ 서사는 CIA의 비밀 활동에 대한 합리적 비판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정파적이고 극단적인 음모론으로 변질되었습니다.
- 핵심 요약 2: 음모론에 대한 믿음은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통제감을 얻으려는 보편적 인간 심리와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에 의해 증폭됩니다.
- 핵심 요약 3: 정부의 실제 비밀주의와 거짓말의 역사가 ‘신뢰 격차’를 만들어 음모론의 토양을 제공했지만, 이는 사건을 조종하는 단일한 실체로서의 ‘딥스테이트’ 존재를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음모론의 파괴적인 힘에 맞서기 위해서는 단순히 거짓 주장을 반박하는 것을 넘어, 더 큰 투명성과 책임지는 정부라는 원칙을 통해 대중 불신의 근원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음 정보를 접할 때, 한 걸음 물러서서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입니다.
참고자료
- The “Deep State”: A Problem that the CIA Helped to Create Leiden Security and Global Affairs
- Review of Peter Dale Scott’s “American War Machine” History News Network
- Forbidden history: CIA censorship, The Invisible Government… Taylor & Francis Online
- Full text of “The Invisible Government by David Wise” Internet Archive
- Agency-a-History-of-the-CIA-8000.pdf Pima County Public Library
- The Invisible Government by David Wise and Thomas B. Ross. Book review CIA
- The Invisible Government - Wikipedia Wikipedia
- Deeper Than the “Deep State”: Follow the Money Origins, Ohio State University
- QAnon | #TranslateHate | AJC American Jewish Committee
- 「음모론이란 무엇인가」 - 국회도서관 국회도서관
- The Psychology of Conspiracy Theories - PMC National Center for Biotechnology Information
- Radical ideas spread through social media. Are the algorithms to blame? PBS NOVA
- 그림자 정부 (음모론) - 위키백과 위키백과
- 세계를 지배하는 ‘그림자 정부’가 있다(?) - 제주일보 제주일보
- 사드 배치 반대와 남한의 그림자 정부 - 미래한국 Weekly 미래한국 Weekly
- 한국정치에서 음모론과 선거의 연관성 KCI
- Findings | National Archives U.S. National 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