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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의 심장, 연준 110년의 역사

pho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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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 인플레이션, 그리고 위기 대응의 서사시

  •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어떻게 탄생했으며, 그 역할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 대공황, 스태그플레이션, 2008 금융위기 등 주요 경제 위기에서 연준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 연준의 정책이 오늘날 우리의 주택담보대출, 투자, 물가에 어떻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오늘 아침, 당신의 주택담보대출 이자율을 확인했거나, 주식 포트폴리오의 등락에 가슴 졸였거나, 혹은 그저 장을 보며 훌쩍 오른 식료품 가격에 한숨을 쉬었다면, 당신은 이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이하 연준)**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 한 발을 들여놓은 셈입니다. 워싱턴 D.C.에서 내려지는 이 결정들은 우리의 지갑, 투자, 그리고 미래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준의 역사는 단순한 경제 정책의 나열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력, 실패, 그리고 적응에 대한 극적인 서사시입니다. 이 글은 110년이 넘는 연준의 격동적인 역사를 따라가며, 어떻게 일련의 거대한 위기들이 이 기관을 제한적인 금융 안전망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기관으로 단련시켰는지 파헤칠 것입니다.


거인의 탄생: 1907년 공황과 연준의 설립

중앙은행 부재의 시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은 ‘도금 시대(Gilded Age)‘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강철과 철도가 나라를 뒤덮는 거대한 산업 강국이었죠. 하지만 이 화려함 뒤에는 중앙은행의 부재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당시 통화 공급은 은행이 보유한 국채 양에 묶여 있어 경제 상황에 따라 신축적으로 조절될 수 없는 ‘비탄력적인 통화(inelastic currency)’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금융 시스템 전체를 주기적인 공황의 위험에 노출시켰습니다.

J.P. 모건, 위기의 구원투수

1907년 10월, 투기 실패의 여파로 월스트리트에 ‘뱅크런’이 발생하며 금융 시스템이 붕괴 직전에 놓였습니다. 뉴욕 증권거래소마저 파산할 위기였죠.

1907년 공황 당시 사실상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했던 금융가 J.P. 모건.
1907년 공황 당시 사실상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했던 금융가 J.P. 모건.

이때 당대 최고의 금융가 **J. P. 모건(John Pierpont Morgan)**이 구원투수로 등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본을 풀고 다른 은행가들을 압박해 구제금융을 조성하며 사실상 중앙은행의 역할을 혼자서 수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경제의 운명이 단 한 명의 민간인 손에 달려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냈고, 중앙은행 설립에 대한 정치적 요구를 폭발시켰습니다.

연방준비법: 타협의 산물

정치적 긴장 속에서 1913년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이 탄생했습니다. 유럽처럼 단일한 중앙은행 대신, 미국 전역을 12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지역 연방준비은행을 두는 분권화된 ‘시스템(System)‘을 고안한 것입니다.

초기 연준의 임무는 거시 경제 관리가 아닌, 금융 시스템의 배관공 역할에 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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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탄력적 통화 공급: 뱅크런 방지를 위한 현금 공급
  2. 최종 대부자 역할: ‘재할인 창구’를 통한 은행 유동성 지원
  3. 지급결제 시스템 개선: 수표 교환 절차 간소화

결정적으로, 이때는 ‘통화 정책’, ‘최대 고용’, ‘물가 안정’ 같은 현대적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공황: 연준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 (1929–1950)

광란의 20년대와 재앙의 씨앗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 불리는 호황이 찾아왔습니다. 연준은 투기적 광풍을 제어하기 위해 1928년과 1929년에 금리를 인상했는데, 훗날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 조치가 경기 침체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주장했습니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연준의 무대응은 경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연준의 무대응은 경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치명적인 무대응과 ‘원죄’

1929년 주가 대폭락 이후 1933년까지 연쇄적인 은행 파산 사태가 미국을 휩쓸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연준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배신했습니다.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해야 할 연준은 수천 개의 은행이 무너지는 것을 사실상 방관했습니다. 이 ‘거대한 배신’으로 인해 미국 통화 공급량은 3분의 1이나 급감했고, 경제의 혈액이 말라버리며 대량 실업의 악순환을 초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준의 ‘원죄’로 기록된 사건입니다.

실패의 원인: 잘못된 사상

연준이 무력했던 이유는 도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잘못된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 진성어음주의(Real Bills Doctrine): 투기적 자산으로 위기에 빠진 은행을 구제하는 것은 중앙은행의 역할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 금본위제(Gold Standard) 맹신: 금 유출을 막기 위해 경제가 붕괴하는 와중에 금리를 대폭 인상하는 최악의 수를 두었습니다. 이는 _불타는 집에 기름을 붓는 격_이었습니다.

훗날 밀턴 프리드먼과 애나 슈워츠는 『미국 통화사』에서 대공황은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정부, 특히 연준의 실패였다고 단언했습니다. 이 뼈아픈 교훈은 훗날 벤 버냉키 의장의 위기 대응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참담한 실패 이후, 연준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고 사실상 독립성을 상실한 채 재무부의 하수인 역할로 전락했습니다.


독립 선언: 1951년 합의와 새로운 권력의 시대

인플레이션 압력과 갈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준은 정부의 막대한 부채를 감당하기 위해 국채 금리를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해야 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플레이션 압력은 커졌고, 1951년 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1%**에 달했습니다.

연준은 금리를 올리고 싶었지만,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이 갈등이 언론에 알려지며 공적인 위기로 비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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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재무부-연준 합의

결국 1951년 3월, 역사적인 **‘재무부-연준 합의(Treasury-Fed Accord)’**가 체결되었습니다.

  • 합의 내용: 연준은 더 이상 정부 요구에 따라 금리를 특정 수준에 고정할 의무를 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 역사적 의의: ‘통화 정책의 해방’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현대 중앙은행의 핵심 원칙인 **‘독립성’**을 확립했습니다. 이로써 연준은 진정한 의미의 통화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통찰: 이 합의는 돈을 쓰는 주체(정부)와 돈의 가치를 통제하는 주체(연준) 사이의 근본적인 권력 재조정이었습니다. 이로써 연준은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더라도 장기적인 물가 안정을 위해 단기적인 고통(금리 인상)을 경제에 가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이 독립성이야말로 1980년대 폴 볼커가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었던 제도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과 이중 책무의 탄생 (1971–1979)

필립스 곡선의 붕괴와 충격

1970년대 이전 경제학계는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사이에 안정적인 역의 관계가 있다는 ‘필립스 곡선(Phillips Curve)’ 이론을 신봉했습니다. 하지만 두 차례의 거대한 충격이 이 믿음을 깨뜨렸습니다.

  • 닉슨 쇼크 (1971):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 태환을 중단하며 금본위제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끊었습니다.
  • OPEC 석유 금수 조치 (1973): 유가가 4배나 폭등하며 경제 전체에 막대한 ‘공급 충격’을 주었습니다.

괴물 ‘스태그플레이션’의 등장

그 결과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즉 높은 실업률과 높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하는 끔찍한 괴물의 등장이었습니다. 경제는 침체(stagnation)하는데 물가는 치솟는(inflation) 모순에 연준은 최악의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이중 책무의 탄생

이 혼란 속에서 1977년 의회는 연준에게 **“최대 고용, 안정적인 물가”**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도록 요구하는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준의 유명한 **‘이중 책무(dual mandate)’**의 탄생입니다.

이것은 명쾌한 해법이라기보다는, 상충하는 두 목표를 연준에게 떠넘긴 정치적 결과물이었습니다. 이 모호한 책임은 다음 의장인 폴 볼커가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볼커 쇼크: 인플레이션이라는 용을 잡다 (1979–1987)

1979년,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15%**에 육박했고,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었습니다. 연준은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죠.

‘인플레이션 파이터’ 폴 볼커. 그의 충격 요법은 미국 경제에 큰 고통을 안겼지만, 인플레이션의 고리를 끊는 데 성공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 폴 볼커. 그의 충격 요법은 미국 경제에 큰 고통을 안겼지만, 인플레이션의 고리를 끊는 데 성공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강경한 반인플레이션론자 **폴 볼커(Paul Volcker)**를 연준 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기대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볼커 쇼크’와 고통스러운 승리

1979년 10월, 볼커는 통화 정책의 급진적인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그 결과 연방기금금리는 1981년 6월, **20%**라는 경이적인 수준까지 치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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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치는 미국 경제를 두 차례의 깊고 고통스러운 경기 침체로 몰아넣었습니다. 실업률은 11%에 육박했고, 사회적 반발은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볼커 쇼크’는 성공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은 1983년 3%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볼커는 독립적인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 연준의 신뢰를 회복시켰고, 이후 20년간 이어질 물가 안정 시대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통찰: 볼커는 이중 책무 중 ‘최대 고용’을 일시적으로 희생시키는 대가로 ‘물가 안정’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성공은 이후 30년 동안 연준의 신뢰성이란 곧 인플레이션과 싸우려는 의지와 동일시되는 강력한 선례를 남겼습니다. 이는 그린스펀, 버냉키, 옐런으로 이어지는 연준의 제도적 DNA가 되었습니다.


마에스트로와 붕괴: 대안정기에서 2008년 위기까지

대안정기와 ‘그린스펀 풋’

폴 볼커 이후 앨런 그린스펀 의장 시절은 낮은 인플레이션과 꾸준한 성장이 지속된 **‘대안정기(The Great Moderation)’**였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연준은 주식시장 붕괴나 금융 위기 때마다 금리를 인하하며 시장 구출에 나섰습니다. 이는 시장에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 즉 연준이 항상 시장을 구제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금융기관들의 과도한 위험 감수를 부추겼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결국 주택 시장 버블이 터졌고,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은 전 세계적인 금융 공황을 촉발했습니다.

대공황 연구의 권위자였던 벤 버냉키 의장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1930년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례 없는 정책들을 총동원했다.
대공황 연구의 권위자였던 벤 버냉키 의장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1930년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례 없는 정책들을 총동원했다.

버냉키의 응답: “우리가 저질렀습니다”

당시 연준 의장은 대공황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벤 버냉키(Ben Bernanke)**였습니다. 그는 1930년대 연준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전례 없는 정책들을 총동원했습니다.

  • 제로금리 정책 (ZIRP): 연방기금금리를 사실상 0%로 인하했습니다.
  • 알파벳 수프 구제금융: 은행뿐만 아니라 금융 시스템의 다른 핵심 부문에도 직접 유동성을 공급했습니다.
  • 양적완화(QE)의 탄생: 새로운 돈을 만들어 막대한 규모의 장기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을 사들여 장기 금리를 직접 끌어내렸습니다.

통찰: 2008년 위기 대응은 연준의 역할을 영구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연준은 전통적인 은행의 규제자에서 금융 시스템 전체의 궁극적인 안전망이자 장기 자산 가격의 직접적인 조종자로 변모했습니다. 이는 연준의 대차대조표가 주요 정책 도구가 되는 ‘뉴 노멀’의 시작이었고, 2020년 더 큰 개입의 선례가 되었습니다.

표 1: 양적완화의 시대 (QE1-Q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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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발표/시작일주요 매입 자산
QE12008년 11월기관채(Agency Debt) 및 MBS
QE1 확장2009년 3월기관채, MBS, 장기 국채
QE22010년 11월장기 국채
QE32012년 9월장기 국채 및 MBS

주: 이 표는 양적완화가 단순한 비상 조치에서 경제 부양을 위한 의도적인 도구로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팬데믹 공황: 연준, 모든 것을 걸다 (2020–2021)

코로나19 팬데믹은 공중 보건 위기가 경제 전체를 강제로 멈춰 세운 사건이었습니다. 붕괴의 속도는 2008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습니다.

제롬 파월(Jerome Powell) 의장이 이끄는 연준은 2008년의 각본을 즉시 꺼내 들었지만, 그 규모와 속도는 이전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 금리를 다시 제로로: 두 차례의 긴급 회의를 통해 금리를 0%로 인하했습니다.
  • 무제한 양적완화: 사실상 ‘무제한 QE’를 선언했습니다.
  • 모든 것을 구제하다: 사상 처음으로 회사채 시장, 지방정부, 중견기업까지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연준의 대차대조표는 2022년 초 거의 9조 달러까지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랐습니다.

차트 1: 연준 대차대조표의 폭발 \(2007-2023\). 2008년과 2020년 위기를 거치며 연준의 자산이 수직 상승하며 역할이 극적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차트 1: 연준 대차대조표의 폭발 \\(2007-2023\\). 2008년과 2020년 위기를 거치며 연준의 자산이 수직 상승하며 역할이 극적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통찰: 2020년 대응은 2008년의 ‘비전통적’ 정책이 이제 연준의 표준 위기 대응 메커니즘이 되었음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회사채 등을 직접 지원하면서 전통적으로 의회의 영역이던 ‘신용 배분’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고, 이는 연준의 독립성과 임무의 한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일시적’이라는 실수와 거대한 전환 (2021–현재)

인플레이션의 급등과 오판

2021년, 막대한 부양책과 억눌렸던 수요가 폭발하며 인플레이션이 급등했습니다. 파월 의장이 이끄는 연준은 처음에 이 인플레이션을 **‘일시적(transitory)’**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지난 10년간의 ‘낮은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 익숙해져, 공급망 병목 현상 때문일 것이라 믿었습니다. 사실상 _지난 전쟁_을 치르고 있었던 셈입니다.

굴욕적인 전환과 공격적인 금리 인상

2021년 말, 인플레이션이 훨씬 끈질기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파월 의장은 ‘일시적’이라는 단어를 공식적으로 “폐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후 연준은 극적인 정책 전환을 단행했습니다. 2022년 3월을 시작으로, 40년 만에 가장 공격적인 금리 인상에 착수하여 1년여 만에 연방기금금리를 0%에서 5% 이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동시에 ‘양적긴축(Quantitative Tightening, QT)‘을 통해 대차대조표 축소에 돌입했습니다.

통찰: ‘일시적’이라는 오판은 현대 연준이 직면한 근본적인 도전을 드러냅니다. 디플레이션 위기를 막는 데 성공한 강력한 도구들이 역설적으로 다음 인플레이션 위기의 조건을 만든 것입니다. 연준은 이제 새로운 사이클에 갇혀 있을 수 있습니다. 디플레이션 위기를 성공적으로 정복한 것이 본질적으로 다음 인플레이션 위기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세계를 헤쳐나가는 것이 연준의 다음 장을 위한 핵심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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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연준의 110년 역사는 위기를 동력으로 삼아 끊임없이 진화해 온 여정이었습니다. 단순한 금융 배관공에서 시작하여, 대공황의 실패를 겪고, 독립적 권력으로 재탄생했으며, 인플레이션의 용을 잡고, 시장의 궁극적인 구원투수가 되었습니다.

핵심 요점 3가지:

  1. 위기가 연준을 만든다: 연준의 권한과 역할은 1907년 공황, 대공황, 2008년 금융위기 등 거대한 위기를 거치며 극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2. 신뢰는 투쟁으로 얻어진다: 1951년 독립성 확보와 1980년대 볼커 쇼크는 정치적 압력에 맞서 장기적인 안정을 추구해야 얻어지는 연준의 신뢰를 상징합니다.
  3. 새로운 시대, 새로운 도전: 2008년 이후 연준은 금융 시스템 전체를 구원하는 막강한 힘을 얻었지만, 이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또 다른 위기를 낳았고, 정책 결정의 어려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연준의 인플레이션 억제, 성장 촉진, 금융 안정 유지라는 세 가지 목표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 드라마와 같습니다. 이 글을 통해 얻은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앞으로 발표될 연준의 정책 결정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자신의 자산 관리에 적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참고자료
  • 1907년 공황 - 위키백과 링크
  • The Evolution of the Role of the Federal Reserve - Mercatus Center 링크
  • Overview: The History of the Federal Reserve - Federal Reserve History 링크
  • [김대호 칼럼] 미국 연준이 주식회사인 이유… FRB의 탄생과 지배구조의 비밀 - 글로벌이코노믹 링크
  • JP모건⑧…1907 금융패닉, 중앙은행 구실하다 - 아틀라스뉴스 링크
  • 1913 Federal Reserve Act: Definition and Why It’s Important - Investopedia 링크
  • 연방준비제도 - 나무위키 링크
  • The Great Depression - Federal Reserve History 링크
  • 대공황의 수렁④…美 연준의 대오류, 금리인상 - 아틀라스뉴스 링크
  • The Treasury-Fed Accord - Federal Reserve History 링크
  • Federal Reserve Reform Act of 1977 - Federal Reserve History 링크
  • Volcker’s Announcement of Anti-Inflation Measures - Federal Reserve History 링크
  • What did the Fed do in response to the COVID-19 crisis? - Brookings Institution 링크
#연준#미국연방준비제도#금리#인플레이션#금융위기#양적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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