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 인문

밥도둑의 역습: 스팸, K-푸드 아이콘이 되다

phoue

5 min read --

캔 속에 담긴 전쟁과 생존, 그리고 문화적 역전의 드라마

  • 하나의 음식이 서구와 한국에서 어떻게 극단적으로 다른 위상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문화적 배경
  • 전쟁 배급품에서 출발해 ‘국민 밥도둑’이자 최고의 명절 선물로 진화한 과정
  • K-푸드 열풍을 타고 원조 국가로 ‘역수출’된 놀라운 문화 역전 현상

두 얼굴의 햄, 스팸 이야기

여기 하나의 음식이 있습니다. 서구권에서 이 음식의 이름은 종종 농담의 소재가 되거나, **“정체불명의 고기(mystery meat)”**라는 꼬리표와 함께 2차 세계대전 시절의 배급품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동일한 음식이, 한국에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서울의 고급 백화점 식품관에 가면, 이 스팸은 우아한 포장 상자에 담겨 소중한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_“품격 있는 선물”_로 진열되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싸구려 정크푸드, 다른 한쪽에서는 명절 최고의 선물. 대체 어떻게 하나의 평범한 가공육 덩어리가 이토록 극적인 이중생활을 하게 된 걸까요? 이 글은 전쟁과 생존, 재창조와 역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문화적 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의 폐허를 거쳐, 마침내 K-푸드의 전도사가 되어 세계 무대로 ‘역습’을 감행하기까지 스팸의 놀라운 여정을 추적해 봅니다.

스팸, 두 개의 얼굴: 서구와 한국의 인식 비교

하나의 제품이 어떻게 문화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지 스팸만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드뭅니다. 서구와 한국에서의 극명한 인식 차이는 스팸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특징서구권 (주로 미국/영국)에서의 인식대한민국에서의 인식
역사적 맥락2차 세계대전 / 전후 배급 식량한국전쟁 / 전후 고급품
주요 이미지저렴하고 편리한 “정크푸드”, 향수를 자극하는 농담프리미엄, 다용도 밥반찬, “밥도둑”
요리 활용간단한 구이, 샌드위치, 키치한 레시피상징적 요리의 핵심 재료 (부대찌개, 김밥), 계란부침
사회적 위상저렴한 식료품 저장고의 필수품소중한 명절 선물세트, 관심과 실용성의 상징
현대 트렌드K-푸드 트렌드를 통한 재발견 및 재평가확고한 “국민 음식”, 글로벌 음식 트렌드의 동인

전쟁의 산물: 미국의 발명품에서 군인의 필수품으로

스팸의 이야기는 1937년 미국 미네소타주 오스틴의 호멜 식품(Hormel Foods)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수익성이 낮았던 돼지고기 어깨살 부위를 활용하기 위해 개발된 이 통조림의 이름은 **‘양념된 햄(SPiced hAm)’**의 줄임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스팸이 세계적인 명성(혹은 악명)을 얻게 된 계기는 전쟁이었습니다. 저렴한 가격에 단백질이 풍부하고 유통기한이 길다는 장점 덕분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병사들의 핵심 식량이 되었습니다. 1억 파운드(약 4만 5천 톤)가 넘는 스팸이 전선으로 보내졌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스팸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먹어야 했던 음식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이러한 과도한 공급은 이내 질색과 피로감으로 이어졌고, ‘정크푸드’로서의 이미지를 굳히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배급되었던 스팸은 전쟁의 상징과도 같은 음식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배급되었던 스팸은 전쟁의 상징과도 같은 음식이었습니다.

운명적 만남: 폐허 속 한국에 찾아온 스팸

이야기의 무대는 1950년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반도로 전환됩니다. 극심한 식량 부족 속에서 신선한 고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치였습니다. 바로 이런 척박한 땅에 미군과 그들의 보급품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군 부대 매점(PX)을 통해 흘러나온 스팸은 당시 한국에서 그 자체가 **‘더 나은 것’**이었습니다. 서구에서 하위 호환의 음식이었다면, 한국에서는 부와 풍요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스팸은 부유하거나 연줄이 좋은 사람만 구할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는 증언처럼, 스팸은 미국의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는 통로이자 절실했던 단백질 공급원이었습니다.

부대찌개의 탄생: 스팸과 김치의 위대한 조화

스팸의 한국사를 이야기할 때, ‘부대찌개’의 발상지인 경기도 의정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유출된 스팸과 소시지를 한국의 김치, 고추장과 함께 끓여낸 이 음식은 하나의 완벽한 퓨전 요리이자, 전후 한국의 시대상을 담아낸 발명품입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1960년 ‘오뎅식당’을 연 고(故) 허기숙 할머니가 있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햄과 소시지를 볶아 팔다가, 손님들의 요청에 김치와 육수를 넣어 찌개로 발전시킨 것이 그 시작입니다. 미국의 잉여 생산물(짜고 기름진 스팸)과 한국의 영혼(맵고 칼칼한 김치)이 하나의 냄비 안에서 만나 기적적인 조화를 이룬 것입니다. _‘부대(Army Base) 찌개’_라는 이름은 그 아프지만 창의적이었던 역사를 자랑스럽게 증언합니다.

Advertisement

미국의 스팸과 한국의 김치가 만나 탄생한 부대찌개는 K-푸드의 대표적인 퓨전 요리입니다.
미국의 스팸과 한국의 김치가 만나 탄생한 부대찌개는 K-푸드의 대표적인 퓨전 요리입니다.

한국화 전략: 스팸, 진정한 ‘밥도둑’이 되다

1987년, CJ제일제당이 미국 호멜사와 기술 제휴를 맺고 국내에서 스팸을 직접 생산하기 시작하며 역사적인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CJ제일제당은 단순히 제품을 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 제품을 ‘개선’했습니다.

돼지고기 함량을 92.44%까지 높이고 전분을 빼 프리미엄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짠맛을 줄이고 더 부드러운 식감을 구현하는 등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2002년, 배우 김원희를 모델로 한 **“따끈한 밥에 스팸 한 조각”**이라는 광고는 스팸이 최고의 ‘밥도둑’임을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키며, 한국 식문화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습니다.

독특한 선물 문화: 스팸, 마음을 전하는 상징이 되다

한국에서 스팸의 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은 바로 ‘명절 선물세트’ 문화입니다. 놀랍게도 스팸 연간 매출의 약 60%가 명절 선물세트 형태로 발생합니다. 여러분에게 스팸 선물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 독특한 문화는 과거 ‘귀한 음식’이었던 역사적 이미지, 합리적인 가격대에 높은 만족도를 주는 ‘가성비’, 그리고 장기 보관이 가능하고 활용도가 높은 실용성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또한, 취향을 거의 타지 않아 실패 확률이 적은 ‘안전한’ 선택지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 독특한 문화는 뉴욕 타임스 등 해외 언론에서도 반복적으로 조명하며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흥미로운 창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명절 기간에 흔히 볼 수 있는 스팸 선물세트는 독특한 선물 문화를 상징합니다.
한국의 명절 기간에 흔히 볼 수 있는 스팸 선물세트는 독특한 선물 문화를 상징합니다.

밥도둑의 역습: K-푸드가 된 스팸의 세계화

수십 년간 일방적으로 문화를 받아들이던 스팸의 역사가 이제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K팝, K드라마로 대표되는 한류를 타고, 스팸이 ‘한국의 맛’을 입고 세계 무대로 역습을 시작한 것입니다.

해외 젊은 세대들은 한국 콘텐츠를 통해 스팸을 ‘힙한 한식의 일부’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조 회사인 호멜 역시 공식 홈페이지에 부대찌개, 김밥 등 한국 요리법을 비중 있게 소개하며 이러한 변화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2024년, 호멜이 미국 시장에 ‘스팸 코리안 BBQ 맛’과 ‘스팸 고추장 맛’을 공식 출시하며 역전의 드라마는 정점을 맞이합니다. 이는 미국이 한국에 전해준 음식이, 이제는 한국의 정체성을 입고 미국 본토로 다시 수출되는 완벽한 문화 역전 현상의 증거입니다.

미국 시장에 출시된 ‘스팸 코리안 BBQ 맛’은 스팸의 문화적 역전을 상징하는 제품입니다.
미국 시장에 출시된 '스팸 코리안 BBQ 맛'은 스팸의 문화적 역전을 상징하는 제품입니다.

Advertisement


결론: 단순한 캔 햄, 그 이상의 의미

스팸의 여정은 캔 속에 담긴 현대 한국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저 역시 명절이면 당연하게 스팸 선물세트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 안에 이토록 깊은 서사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 생존과 풍요의 상징: 스팸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생존을 위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 창의적 재창조: 부대찌개와 같은 독창적인 요리로 재탄생하고, 현지화 전략을 통해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 문화 역전의 아이콘: 이제 K-푸드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본고장으로 역수출되며 문화적 정체성의 힘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음식의 진정한 의미는 재료가 아닌, 그것을 끌어안은 사람들의 역사와 마음에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식탁 위 스팸 한 조각에서 전쟁과 생존, 그리고 문화의 힘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발견해 보세요. 관련하여 스팸을 활용한 여러분만의 특별한 레시피가 있다면 댓글로 공유해주세요.

참고자료
  • 스팸 (햄) - 내위키 링크

  • 스팸은 ‘전쟁 영웅’이었다 - zum 허브 링크

  • NY Times on Spam in Korea: The ‘Glamour of Pink Bricks of Pork Shoulder’ 링크

  • 미군 전투식량에서 韓국민반찬으로…스팸 30년史 - 한국경제 링크

  • ‘국민 선물’ 스팸, 명절에 특히 사랑받는 이유는? – CJ 뉴스룸 링크

  • 전투식량이던 스팸, 한국이 소비량 세계 2위 - 조선일보 링크

  • [갓 오브 브랜드] CJ제일제당 ‘스팸’…31년 한국인 입맛 사로잡은 ‘밥도둑’ - 이투데이 링크

  • 명절마다 뜨는 ‘스팸’ 인기…선물세트로 읽는 설 경제 - 우먼타임스 링크

    Advertisement

  • K-푸드 열풍에 스팸도 떴다? “한국은 이렇게 먹어요” [식탐] - 헤럴드경제 링크

  • [정의구현 사전] 스팸 - 한겨레21 링크

  • From Seoul to Supermarkets - Inspired - Hormel Foods 링크

  • The Makers of the SPAM® Brand Fire Up Fan Tastebuds with New SPAM® Korean BBQ Flavored Variety - Hormel Foods 링크

#스팸#부대찌개#k푸드#명절선물#호멜푸드#cj제일제당

Recommended for You

자율성 프리미엄: 돈으로 시간을 사는 법, 당신도 진짜 부자가 될 수 있다

자율성 프리미엄: 돈으로 시간을 사는 법, 당신도 진짜 부자가 될 수 있다

13 min read --
아마존과 구글은 어떻게 실패를 설계해 성공했는가?

아마존과 구글은 어떻게 실패를 설계해 성공했는가?

9 min read --
월급은 오르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시간 부자'가 되는 비밀

월급은 오르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시간 부자'가 되는 비밀

6 min read --

Advertisemen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