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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우주의 설계자

pho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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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우주에 새겨진 거대한 물음표

95%라는 이름의 수수께끼

여러분, 우리가 밤하늘에서 보는 별, 우리가 발 딛고 선 행성, 그리고 우리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물질을 다 합쳐도 우주 전체의 겨우 **5%**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믿어지시나요? 마치 거대한 도서관에 들어가 책 한 권의 목차만 읽고 전부를 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죠. 현대 우주론이 우리에게 던진 가장 거대한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95%**는 대체 무엇일까?”

과학자들은 이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이름표를 붙여주었습니다. 약 **27%**는 우주를 하나로 묶어주는 ‘암흑물질‘이라는 이름의 우주적 접착제이고, 약 **68%**는 우주를 점점 더 빠르게 팽창시키는 ‘암흑에너지‘라는 미지의 힘이죠.

우주의 구성 비율을 나타내는 원그래프.
우주의 구성 비율을 나타내는 원그래프.

‘암흑’이라는 단어 때문에 무언가 검고 사악한 것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사실 이건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뜻에 더 가까워요. 이들은 빛을 내지도, 반사하지도, 심지어 막지도 않고 그냥 통과시키기 때문에 우리 눈이나 어떤 장비로도 볼 수 없는, 말 그대로 ‘투명한 존재‘랍니다.

이 이야기는 그중에서도 우주의 거대한 구조를 설계하고 지금의 은하들을 만든 보이지 않는 건축가, 암흑물질의 흔적을 추적하는 탐정들의 이야기입니다.

유령의 첫 속삭임: 증거를 찾아서

과학자들이 암흑물질이라는 유령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 것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들려온 일관된 속삭임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빨리 도는 회전목마, 은하

가장 처음 들려온 속삭임은 은하의 회전 속도에 관한 것이었어요. 1970년대, 천문학자 베라 루빈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태양계에서 태양과 멀어질수록 행성이 느리게 돌듯, 은하도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별들이 느리게 돌아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관측한 은하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바깥쪽 별들도 중심부만큼이나 빠르게 돌고 있었죠.

은하 회전 속도 곡선 그래프 (예측과 실제 관측 비교)
은하 회전 속도 곡선 그래프 \(예측과 실제 관측 비교\)

이 미스터리를 풀 방법은 단 하나, 우리 눈에 보이는 별과 가스를 훨씬 넘어서까지 거대한 ‘암흑물질 헤일로‘가 은하 전체를 감싸고 있다는 가설뿐이었습니다. 보이는 물질보다 무려 5배나 많은 이 보이지 않는 질량이 바로 은하라는 거대한 회전목마가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손길이었던 셈이죠.

시공간을 휘게 하는 돋보기, 중력 렌즈

아인슈타인은 질량이 주변의 시공간을 휘게 만든다고 했어요. 무거운 볼링공이 고무판을 누르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 휘어진 공간을 지나는 빛 역시 경로가 휜답니다. 이것이 바로 ‘중력 렌즈 효과‘인데, 중요한 점은 질량이 빛을 내든 내지 않든 상관없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빛과 상호작용하지 않는 암흑물질의 존재와 분포를 ‘볼’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얻게 되었죠.

거대 은하단 뒤편의 은하에서 온 빛이 휘어져 여러 개의 상으로 보이거나 길게 늘어진 호 모양으로 왜곡된 이미지.
거대 은하단 뒤편의 은하에서 온 빛이 휘어져 여러 개의 상으로 보이거나 길게 늘어진 호 모양으로 왜곡된 이미지.

때로는 멀리 있는 은하의 빛이 길게 늘어진 호(arc) 모양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우주 전역의 은하들이 미세하게 일그러진 모양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암흑물질이 어디에 얼마나 모여 있는지 3차원 지도를 그릴 수도 있습니다. 이 지도는 암흑물질이 우주에 거대한 거미줄처럼 퍼져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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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첫 울음소리, 태초의 빛

우주 나이 약 38만 살 때, 뜨겁던 우주가 식으며 마침내 빛이 자유롭게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태초의 빛’은 138억 년이 흐른 지금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CMB)‘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도착했죠. 이 빛은 우주 전체의 ‘아기 사진’과도 같아요.

플랑크 위성이 촬영한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 지도
플랑크 위성이 촬영한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 지도

이 아기 사진에는 미세한 온도 차이로 된 얼룩무늬가 있는데, 이 무늬의 패턴을 분석하면 우주의 재료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분석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빛과 상호작용하지 않는 암흑물질이 일반 물질보다 5배나 더 많지 않고서는 이 무늬가 절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죠. 우주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암흑물질은 이미 그곳에 있었던 겁니다.

거대한 건축의 뼈대, 우주 거대 구조

오늘날 은하들은 우주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게 아니라, 거대한 필라멘트가 얽힌 ‘우주 거대 구조‘라는 거미줄을 따라 분포합니다. 이런 거대한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빅뱅 직후, 일반 물질은 빛의 압력 때문에 쉽게 뭉칠 수 없었습니다. 이때 빛의 방해를 받지 않는 암흑물질이 먼저 뭉치기 시작하며 ‘중력의 우물‘을 팠습니다. 마치 건물을 짓기 위해 **뼈대(비계)**를 먼저 세우는 것처럼요. 그리고 나중에 우주가 식자, 일반 물질들이 이 암흑물질의 뼈대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 비로소 별과 은하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증거들은 각각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서 암흑물질이라는 동일한 용의자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이제 탐정인 우리 과학자들은 이 유령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본격적인 수사에 나섭니다.

***

2부: 유령 사냥꾼들의 이야기

암흑물질이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 앞에서, 과학자들의 다음 질문은 당연히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대체 뭔데?”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거대한 유령 사냥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들

암흑물질은 우리가 아는 평범한 입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랬다면 벌써 발견되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과학자들은 우리가 아직 모르는 새로운 입자일 것이라 생각하고 몇몇 유력한 용의자를 추렸습니다.

윔프(WIMP)

수십 년간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윔프(WIMP)‘였습니다. ‘약하게 상호작용하는 무거운 입자’라는 뜻이죠. 윔프는 양성자보다 수십~수천 배 무겁고, 이름처럼 아주 약한 힘으로만 상호작용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윔프가 특별했던 이유는 ‘윔프의 기적‘이라 불리는 놀라운 우연의 일치 때문이었습니다. 복잡한 계산을 해보니, 빅뱅 초기에 윔프 같은 입자가 있었다면, 우주가 식으면서 자연스럽게 딱 지금 우리가 관측하는 암흑물질의 양만큼만 남게 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전혀 다른 이론에서 예측된 입자가 우주의 미스터리를 이렇게 완벽하게 설명한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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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시온(Axion)

하지만 수십 년간 윔프를 찾아 헤맸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자, 새로운 용의자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액시온(Axion)‘입니다. 윔프와는 정반대로, 전자보다도 수조 배나 가벼운 아주 작은 입자죠.

액시온의 매력 역시 윔프처럼, 원래 암흑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입자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액시온은 입자물리학의 다른 난제를 풀기 위해 제안되었는데, 알고 보니 이 녀석이 암흑물질의 조건도 완벽하게 만족시켰던 겁니다. 마치 집 현관 열쇠를 만들었는데, 알고 보니 은행 비밀금고까지 열리는 격이었죠.

전 지구적인 수사망

이 용의자들을 잡기 위해, 과학자들은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거대한 그물망을 쳤습니다.

  1. 직접 탐색 (기다리는 함정): 이 방법은 우리 은하를 떠다니는 암흑물질이 지구를 뚫고 지나가다가, 아주 깊은 지하 실험실에 설치된 검출기와 ‘쿵’하고 부딪히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1년에 몇 번 일어날까 말까 한 희귀한 충돌을 잡기 위해, 과학자들은 우주의 다른 모든 소음을 차단한 극도로 조용한 환경을 만들어 암흑물질의 속삭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하 깊은 곳에 설치된 거대한 액체 제논 검출기 내부 사진
지하 깊은 곳에 설치된 거대한 액체 제논 검출기 내부 사진

  1. 간접 탐색 (남겨진 흔적 찾기): 암흑물질 두 개가 서로 부딪혀 소멸할 때 감마선 같은 흔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우주 망원경으로 은하 중심처럼 암흑물질이 많을 법한 곳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며, 이들이 남긴 흔적(연기)을 찾아 범인(불)을 추적하는 방식입니다.
  2. 가속기 탐색 (범인 직접 만들기): 기다리거나 흔적을 찾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빅뱅 직후의 환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암흑물질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접근법입니다. 유럽의 거대 강입자 충돌기(LHC) 같은 곳에서 입자들을 어마어마한 속도로 충돌시켜, 그 순간 태어나는 보이지 않는 입자(잃어버린 에너지)의 형태로 암흑물질의 증거를 찾습니다.

***

3부: 끝나지 않은 논쟁

암흑물질이라는 아이디어는 우주 전체를 설명하는 데 큰 성공을 거뒀지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습니다. 몇몇 관측 결과는 기존의 생각과 어긋나며 새로운 논쟁을 낳았죠.

표준 모형의 작은 균열들

암흑물질 시뮬레이션은 은하 중심부의 밀도가 뾰족하게 치솟는(’첨점’) 구조를 예측했지만, 실제 관측된 많은 은하들은 중심부가 평탄한 ‘핵심’ 구조를 보였습니다. 또, 시뮬레이션은 우리 은하 주변에 수백 개의 작은 위성 은하가 있어야 한다고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수십 개밖에 발견되지 않았죠.

이런 ‘소규모 위기‘는 암흑물질 이론이 틀렸다는 증거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별이 태어나고 폭발하면서 뿜어내는 에너지(일반 물질 피드백)가 암흑물질의 분포에 영향을 미쳐 중심부를 평탄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암흑물질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성질을 가졌을 수도 있다는 단서일지도 모릅니다.

유령은 없다? 새로운 중력 이론

“만약 암흑물질이라는 유령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런 대담한 생각을 바탕으로 태어난 이론이 바로 ‘수정 뉴턴 역학(MOND)‘입니다. 이 이론은 미지의 물질을 가정하는 대신, 중력 법칙 자체가 아주 약한 힘만 작용하는 환경에서는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르게 행동한다고 주장합니다.

MOND는 놀랍게도 많은 은하들의 회전 속도를 암흑물질 없이도 정확하게 설명해냈습니다. 하지만 은하보다 훨씬 큰 은하단 규모나, 우주 전체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는 실패하며 한계에 부딪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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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증거: 총알 은하단

암흑물질과 MOND의 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바로 ‘총알 은하단‘입니다. 이곳은 두 개의 거대한 은하단이 서로를 정면으로 뚫고 지나간 거대한 우주 교통사고 현장입니다.

총알 은하단의 합성 이미지 (가시광선, X선, 중력렌즈 맵 중첩)
총알 은하단의 합성 이미지 \(가시광선, X선, 중력렌즈 맵 중첩\)

이 충돌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 일반 물질 (뜨거운 가스): 은하단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스는 서로 부딪혀 속도가 느려지면서 중앙에 남았습니다. (이미지에서 분홍색 부분)
  • 별과 은하: 서로 부딪히지 않고 거의 그대로 통과했습니다.
  • 전체 질량의 중심: 중력 렌즈 효과로 측정한 질량의 중심은, 일반 물질이 모여있는 중앙이 아니라, 충돌을 뚫고 지나간 양쪽의 은하들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이미지에서 파란색 부분)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물질의 대부분(가스)이 있는 곳과 중력의 중심이 분리되었다는 것이죠. 이는 중력의 원천이 되는, 눈에 보이지 않고 서로 상호작용도 하지 않는 무언가가 별들과 함께 움직였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MOND 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현상은, 암흑물질이 실재한다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

4부: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

수십 년간의 탐색에도 우리는 아직 암흑물질 입자를 직접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결과 자체가 ‘용의자는 이곳에 없다’는 귀중한 정보가 되어, 우리의 수사 방향을 더 정확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 최전선의 소식

최근 미국에서 진행된 LUX-ZEPLIN(LZ) 실험은 전례 없는 감도로 윔프를 탐색했지만, 아무런 신호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 결과는 윔프가 존재한다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리와 상호작용하지 않는, 더 깊은 곳에 숨어있는 존재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윔프의 존재 가능성이 점점 좁아지면서, 과학계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액시온과 같은 다른 용의자들에게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초과학연구원(IBS)을 포함한 전 세계의 연구팀들이 새로운 기술로 액시온을 찾기 위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죠.

끝나지 않을 위대한 질문

우리는 암흑물질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우주를 설계했다는 강력하고 일관된 증거들을 확인했습니다. 그 존재는 확실하지만, 그 정체는 여전히 깊은 안갯속에 있습니다.

암흑물질의 정체를 찾는 여정은 단순히 새로운 입자 하나를 발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이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은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인류의 위대한 지적 탐험입니다.

깊은 땅속의 검출기에서, 우주를 항해하는 망원경에서, 언젠가 결정적인 신호가 도착하는 그날, 인류는 비로소 우주의 진짜 설계도를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우주의 95%는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는 거대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미스터리가 있기에, 우리의 탐험은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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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물질, 암흑에너지#우주론#윔프#액시온#중력렌즈#우주마이크로파배경복사#MOND#총알은하단#입자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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