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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제국 발해, 동북공정 속 주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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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벌판의 거친 바람 속에서 천 년 전 사라진 제국, 발해의 진짜 주인을 찾아 떠나는 여정.

  • 동북공정이 발해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핵심 논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한민족의 국가임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고대사 논쟁이 오늘날 우리에게 왜 중요한지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만주 벌판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눈앞에는 한때 위대한 제국의 심장이었던 도시의 희미한 윤곽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바로 유령처럼 사라진 제국, 발해의 옛 터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과연 이 땅 아래 잠든 역사의 주인은 누구인가?

228년간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이 제국은 오늘날 21세기 가장 치열한 ‘역사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바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입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과 미래가 걸린 현재진행형의 싸움입니다.

이 글은 그 거대한 싸움의 심장부로 떠나는 여정입니다. 발해인들이 남긴 단서들을 따라가며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 것입니다.

한때 발해가 호령했던 만주의 광활한 대지.
한때 발해가 호령했던 만주의 광활한 대지.

1부: 고구려의 불사조 - 발해의 탄생과 부흥

잿더미 속에서 일어선 왕국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서기 668년, 강대했던 고구려 제국의 비극적인 멸망에서 비롯됩니다. 나라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 유민들 가운데, 훗날 역사의 주인공이 될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대조영(大祚榮), 고구려의 옛 장수였습니다. 그는 패망한 국가의 희망을 짊어진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을 이끌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발해의 시조 대조영.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을 이끌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발해의 시조 대조영.

696년,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켜 당의 동북 국경이 혼란에 휩싸이자 대조영은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는 고구려 유민과 동맹 말갈 부족을 이끌고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 천문령 전투에서 당의 추격군을 격파하는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둡니다.

마침내 698년, 동모산 기슭에 새로운 왕국 **진(振)**을 세웁니다. 동쪽에서 부활한 그들의 존재를 천하에 알리는 강력한 선언이었습니다.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 (海東盛國)

발해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연해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아우르는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남쪽의 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북방을 지키는 진정한 고구려의 후계자였기에, 훗날 실학자 유득공은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라 명명했습니다.

특히 제10대 선왕(宣王) 대에 이르러 발해는 최전성기를 맞이했고, 당나라조차 부러움 섞인 찬사를 보내며 **‘해동성국(海東盛國)’, 즉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별칭을 붙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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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926년, 새롭게 부상하던 거란족의 기습 침공으로 막강했던 제국은 갑작스럽게 무너졌습니다. 발해는 찬란한 유산과 함께 거대한 역사의 공백을 남겼고, 바로 그 공백이 오늘날 ‘주인 찾기’ 전쟁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2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주장 - 동북공정의 논리를 해부하다

동북공정은 발해를 어떻게 규정할까요? 그들의 핵심 주장은 발해는 한민족의 국가가 아니며, 말갈족이 세운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라는 것입니다.

  • 제1 논리: 건국자는 말갈족이다 중국 학계는 《구당서(舊唐書)》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인 속말말갈 출신(本高麗別種粟末靺鞨)‘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대조영의 혈통이 말갈족이라고 주장합니다. 말갈족은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이므로, 발해는 자연스럽게 중국사가 된다는 논리입니다.
  • 제2 논리: 이름과 왕위는 당나라가 내려준 것이다 713년, 당나라가 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작위를 ‘하사’한 것을 근거로, 국가의 정체성 자체가 당에 의해 부여된 종속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 제3 논리: 조공-책봉 관계는 상하 관계의 증거다 발해가 당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은 것을 명백한 주군-신하 관계의 증거로 제시하며, 발해는 독립 국가가 아닌 당나라 제국 내의 **‘지방정권(地方政權)’**에 불과했다고 결론 내립니다.

이러한 주장은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닌,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이라는 정치적 필요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현재 중국 국경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여,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 가능성을 차단하고 미래의 영토 분쟁 소지를 없애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3부: 고구려의 메아리 - 한민족 국가의 증거들

이제 탐정의 돋보기를 들고 동북공정의 주장을 반박할 증거들을 찾아 나설 시간입니다. 다행히 발해인들은 자신들의 진짜 이야기를 곳곳에 남겨두었습니다.

단서 1: 외교 문서의 증언 - “우리는 고려의 왕이다”

‘지방정권’ 주장을 가장 통렬하게 무너뜨리는 증거는 발해인들 자신의 목소리입니다. 그들은 일본에 보낸 공식 외교문서, 즉 **국서(國書)**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 727년,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았다(復高麗之舊居)”**고 당당히 선언했습니다.
  • 뒤를 이은 문왕은 스스로를 **“고려국왕 대흠무(高麗國王 大欽茂)”**라고 칭했습니다.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합니다.

이는 일본의 공식 역사서인 **《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도 교차 검증됩니다. 일본은 발해를 일관되게 ‘고려’로, 그 사신을 ‘고려사(高麗使)‘라고 기록했습니다. 자신의 ‘주인’이라는 당나라의 동맹국(신라)에 맞서기 위해 다른 나라(일본)와 동맹을 맺는 ‘지방 정권’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속일본기\(續日本紀\)

단서 2: 땅속의 진실 - 두 공주와 온돌의 이야기

제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고고학적 증거입니다. 마치 발해가 남긴 타임캡슐처럼, 유물과 유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정혜공주묘와 정효공주묘: 문왕의 두 딸 무덤은 결정적 단서를 제공합니다. 정혜공주묘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굴식 돌방무덤입니다. 동생인 정효공주묘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이지만, 천장 구조는 고구려의 전통 양식인 모줄임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묘비명에 아버지 문왕을 황제에게만 사용하는 칭호인 **‘황상(皇上)’**으로 기록했습니다.
  • 온돌(溫突)의 흔적: 한민족 고유의 난방 방식인 온돌은 발해 제국의 수도, 귀족과 평민의 거주지, 심지어 러시아 연해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전역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고구려로부터 이어지는 생활 문화의 직접적인 계승을 보여줍니다.

이 증거들은 발해가 당나라 문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 계승이라는 자부심 위에서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취사선택한 자신감 넘치는 독립 제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발해의 영토 전역에서 발견되는 온돌 유적은 고구려 문화 계승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발해의 영토 전역에서 발견되는 온돌 유적은 고구려 문화 계승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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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 3: 이름의 힘 - 독자적 연호의 사용

발해는 인안(仁安), 대흥(大興) 등 자신들만의 **연호(年號)**를 사용했습니다. 동아시아 세계관에서 독자적 연호를 선포하는 행위는 오직 ‘천자(天子)’, 즉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주권의 최종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이 행위 하나만으로도 ‘지방 정권’ 이론은 근본적으로 흔들립니다.

단서 4: 전쟁, 독립을 외치다

732년, 무왕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수군을 동원해 당의 등주(산둥반도)를 선제공격했습니다. 이는 주권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벌인 명백한 국제 전쟁이었습니다. ‘지방 정권’이 바다 건너 ‘중앙 정부’를 침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구분고구려의 유산발해의 발현
정치적 정체성공식 국호 ‘고려(高麗)’ 사용일본 외교문서에 ‘고려국왕’ 칭호 사용, ‘고구려 옛 땅 회복’ 천명
주권독자적 연호 사용 (예: 영락)독자적 연호 사용 (예: 인안, 대흥), 내부적 황제 칭호 ‘황상’ 사용
무덤 양식굴식 돌방무덤, 모줄임 천장정혜공주묘(고구려식), 정효공주묘(고구려식 천장 유지)
주거 문화온돌(溫突) 난방 방식제국 전역의 궁궐, 주거지에서 온돌 유적 발견
유물치미, 막새기와, 불상 양식기와, 불상, 토기 등에서 고구려 양식의 직접적 계승 확인
역사적 기억-조선 유득공의 ‘남북국시대’ 개념, 고려의 발해 유민 수용

4부: 외부의 목소리 - 국제 사회는 발해를 어떻게 볼까?

제3자 증인들은 발해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 북쪽에서의 시선 (러시아): 초기 러시아 학계는 중국 측 문헌에 의존했지만, 1990년대 이후 연해주 지역에서 온돌 등 고구려 문화의 명백한 증거들이 발굴되자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현재 많은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자적인 국가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 동쪽에서의 시선 (일본): 이 부분은 특히 흥미롭습니다. 고대 일본은 발해를 직접 만난 ‘목격자’로서, 그들의 역사서에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으로 생생히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현대 일본 학자들은 이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며 ‘다민족 국가’라는 중립적 용어를 선호합니다.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찾을 때, 현대의 냉정한 해석보다 당시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에 더 큰 무게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결론

모든 증거는 하나의 결론을 가리킵니다. 발해는 결코 중국의 수동적인 지방 정권이 아니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자랑스럽고 주체적이며 강력한 한민족의 북방 제국이었습니다.

이 싸움이 중요한 이유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북공정의 논리는 오늘날 김치, 한복 등을 중국의 문화라고 주장하는 **‘문화공정(文化工程)’**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웃의 문화를 ‘중화(中華)‘라는 거대한 우산 아래로 흡수하려는 동일한 논리의 연장선입니다.

  • 핵심 요약
  1.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명백히 선언했습니다.
  2. 무덤, 온돌 등 고고학적 증거는 고구려 문화의 직접적 계승을 증명합니다.
  3. 발해 역사 논쟁은 김치, 한복 등으로 이어지는 현재진행형 문화 전쟁의 일부입니다.

발해의 역사를 지키는 싸움은 결국 우리의 이야기를 스스로 할 권리를 지키는 싸움입니다. 만주 벌판의 유령 제국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귀 기울이는 것은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참고자료
#발해#동북공정#고구려#역사왜곡#남북국시대#대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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