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의 이상한 소비
혹시 주변에 그런 친구 없으신가요? 월급날 ‘나를 위한 선물’이라며 100만 원짜리 명품 가방은 망설임 없이 구매하면서, 정작 1만 원짜리 택시비는 벌벌 떠는 친구 말이에요. 또, 힘들게 번 돈으로 투자한 주식이 반 토막이 났는데도 “언젠간 오르겠지”라며 팔지 못하고, 오히려 푼돈으로 얻은 공돈은 ‘없어도 되는 돈’이라며 쉽게 써버리는 모습은요?
옆에서 보면 “쟤 왜 저래?”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돈에 대한 결정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이런 모습을 보며 혀를 차거나, 스스로 비슷한 결정을 내리고는 ‘나는 정말 바보인가?’라며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은, 아무도 미치지 않았다는 이야기 말이죠.
우리의 뇌, 사실은 돈 계산에 서툴다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우리 뇌의 최우선 과제는 ‘생존’이었습니다. 눈앞의 열매를 딸 것인가, 저기 보이는 맹수를 피할 것인가. 이런 즉각적이고 생존에 직결된 판단이 중요했죠. 뇌는 복잡한 숫자를 계산하기보다는, 눈앞의 위험을 피하고 기회를 잡는 데 최적화되도록 진화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천 년 사이에 ‘돈’이라는 아주 복잡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우리 뇌는 아직 이 새로운 개념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돈을 다룰 때, 마치 오래된 운영체제로 최신 게임을 돌리려는 것처럼 종종 오류를 일으키곤 합니다.
이런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행동경제학입니다. 인간을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 가정하는 전통 경제학과 달리, 행동경제학은 심리학의 렌즈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인지적 한계가 경제적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했죠.
마음속의 가계부: 심리적 회계 (Mental Accounting)
다시 서두의 친구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왜 100만 원짜리 가방은 쉽게 사면서 1만 원 택시비는 아까워했을까요? 바로 우리 마음속에 ‘심리적 회계’라는 장부가 있기 때문입니다.
행동경제학의 창시자 리처드 탈러가 말한 이 개념은, 우리가 돈에 ‘꼬리표’를 붙여 저마다 다른 계좌에 넣어두고 관리한다는 이론입니다.
- 열심히 일해 번 월급: ‘소중한 돈’ 계좌
- 보너스나 경품으로 생긴 공돈: ‘꽁돈’ 계좌
- 여행을 위해 모아둔 돈: ‘즐거움을 위한 돈’ 계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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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100만 원은 한 달간 고생한 나에게 주는 ‘보상’ 계좌에서 나가는 돈이었고, 택시비 1만 원은 아껴야 할 ‘생활비’ 계좌에서 나가는 돈이었던 셈입니다. 똑같은 ‘돈’이지만, 어떤 꼬리표가 붙었느냐에 따라 그 가치와 쓰임새를 완전히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기치 않게 생긴 돈은 쉽게 써버리고, 적금 통장에 있는 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우리 마음속에서는 나름의 논리적인 회계 처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얻는 기쁨보다 잃는 고통이 더 크다: 손실 회피 (Loss Aversion)
주식 투자에서 손해를 보고도 팔지 못하는 ‘존버’ 정신. 이것 역시 우리 뇌의 깊숙한 곳에 뿌리 박힌 ‘손실 회피’ 성향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같은 금액이라도 이익에서 얻는 기쁨보다 손실에서 느끼는 고통을 약 2.5배 더 크게 느낀다고 합니다. 즉, 10만 원을 얻었을 때의 기쁨보다 10만 원을 잃었을 때의 고통이 훨씬 더 아프게 다가온다는 뜻이죠.
주식을 파는 순간, ‘손실’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됩니다. 이 고통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뇌는 “언젠간 오를 거야”, “아직 팔지 않았으니 손해 본 게 아니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결정을 미루는 쪽을 택합니다. 합리적인 투자 판단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적 반응인 셈이죠.
누구도 미치지 않았다, 다만 인간적일 뿐
이처럼 우리가 돈 앞에서 내리는 수많은 ‘미친’ 결정들은 사실 미쳐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결정은 스프레드시트 위에서 움직이는 숫자가 아니라, 각자의 경험, 감정, 그리고 수만 년에 걸쳐 진화해 온 뇌의 작동 방식이 빚어낸 결과물입니다.
- 나의 어린 시절 경험: 가난하게 자란 사람은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여길 수 있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돈을 더 과감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 지금 나의 감정 상태: 기분이 좋을 때는 충동구매를 하기 쉽고, 불안할 때는 섣부른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 정보의 홍수: 너무 많은 정보는 오히려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고, 가장 눈에 띄거나 최근에 들은 정보에 의존하게 만듭니다(닻 내림 효과, 최신 편향).
그러니 혹시라도 친구의 이해할 수 없는 소비 습관을 보게 되거나, 돈 문제로 자책하게 될 때, 이 이야기를 떠올려주세요. “아, 저 사람의 마음속에선 저런 이야기가 있겠구나”, “나는 지금 이런 감정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리고 있구나” 하고 말이죠.
우리의 ‘비합리성’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돈 앞에서 더 현명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첫걸음이 아닐까요? 결국 돈을 다루는 기술은 수학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