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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 vs 스프라이트: 120년 탄산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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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도둑맞은 음료부터 제로 칼로리 전쟁까지, 두 거인의 라이벌 열전

사이다, 그 이름에 얽힌 비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이 당연하게 여기던 세상이 살짝 뒤틀리는 경험을 먼저 선물해 드릴까 합니다. 지금 냉장고에 있는 ‘사이다’ 한 캔을 떠올려 보세요. 맑고 투명한 액체, 레몬과 라임 향, 그리고 목구멍을 탁 치는 짜릿한 탄산. 그렇죠? 그런데 만약 제가 “그건 사이다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원래 유럽에서 ‘사이다(cider)‘는 사과를 발효시켜 만든 황금빛 술을 의미합니다. ‘독한 술’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죠. 이 단어가 한국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 서구 문물이 일본을 통해 동아시아로 들어오던 시절의 일입니다.

유럽의 전통적인 사이다(Cider)는 사과 발효주를 의미합니다.
유럽의 전통적인 사이다\(Cider\)는 사과 발효주를 의미합니다.

일본 요코하마의 한 영국 상인이 탄산수에 향료를 섞어 ‘샴페인 사이다’로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줄어들어 ‘사이다(サイダー)‘라는 이름으로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을 통해 새로운 의미의 ‘사이다’가 한반도로 건너온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사이다의 이름은 단순한 오해를 넘어, 서구 문물이 일본을 통해 유입되던 시대의 흐름이 담긴 ‘역사적 유물’인 셈입니다.

인천에서 시작된 별, 최초의 사이다

때는 1905년, 개항 도시 인천. 히라야마 마츠타로라는 일본인 사업가가 ‘인천탄산수제조소’를 세우고 한반도 최초의 사이다, **‘성인표(星印標) 사이다’**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라벨 중앙의 별 모양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별표사이다’**라 불렀습니다.

한반도 최초의 사이다, ‘별표사이다’의 광고.
한반도 최초의 사이다, '별표사이다'의 광고.

톡 쏘는 달콤함과 청량감으로 ‘별표사이다’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경인선 기차에 전면 광고가 실릴 정도였습니다. 이 ‘별’의 유산은 1937년 ‘경인합동음료’의 ‘스타사이다(Star Cider)‘로 이어졌고, 코미디언 서영춘 선생의 유행어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를 탄생시키며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서울의 일곱 별, 국민 사이다의 탄생

해방과 분단의 아픔이 교차하던 1949년 서울. 고향을 북에 둔 7명의 실향민이 ‘우리 손으로 사이다를 만들자’는 일념으로 ‘동방청량음료합명회사’를 세웠습니다.

창업 동지 7명의 성(姓)이 모두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일곱 개의 성’이라는 뜻의 ‘칠성(七星)’**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칠성사이다’**가 탄생하며, 인천에서 시작된 ‘별(星)‘의 상징을 ‘일곱 개의 별(七星)‘로 계승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의 칠성사이다 병과 광고.
1950년대의 칠성사이다 병과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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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5월 9일 첫 제품이 출시되었지만, 한 달여 만에 6.25 전쟁으로 공장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칠성사이다의 역사는 대한민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이후 칠성사이다는 목욕탕의 시원함, 명절의 청량함, 더부룩할 때 찾는 소화제 같은 존재로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며 명실상부한 **‘국민 사이다’**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글로벌 거인의 등장: 스프라이트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는 ‘콜라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코카콜라 컴퍼니는 레몬-라임 소다 시장의 강자 ‘7 Up’을 견제하기 위한 무기가 필요했습니다.

그 해답은 1959년 서독에서 개발된 ‘투명한 레몬 환타(Fanta Klare Zitrone)‘였습니다. 이 음료는 1961년, **물이나 공기의 요정을 뜻하는 ‘스프라이트(Sprite)’**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미국 시장에 상륙했습니다.

1940년대 광고에 등장했던 ‘스프라이트 보이’ 캐릭터.
1940년대 광고에 등장했던 '스프라이트 보이' 캐릭터.

스프라이트의 탄생 서사는 칠성사이다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민족의 아픔과 재기 염원이 담긴 ‘창조’가 아닌, 시장 쟁탈을 위한 치밀한 **‘기업 전략’**의 산물이었습니다. 스프라이트는 1980년대 후반부터 힙합, 농구 등 하위문화와 손잡고 **“Obey Your Thirst(네 갈증에 복종하라)”**라는 도발적인 슬로건을 내세우며 순식간에 ‘쿨함’의 상징으로 떠올랐습니다.

1992년의 혈투: 사이다와 스프라이트의 첫 만남

1992년, 아시아 시장을 정복한 스프라이트가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습니다. ‘국민 사이다’ 칠성사이다를 보유한 롯데칠성은 세계 음료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대담한 작전을 실행합니다. 바로 **‘스프린트(Sprint)’**라는 모방 제품을 출시한 것입니다.

스프라이트의 시장 진입을 막기 위해 출시된 롯데칠성의 ‘스프린트’.
스프라이트의 시장 진입을 막기 위해 출시된 롯데칠성의 '스프린트'.

이름, 디자인, 맛까지 스프라이트와 유사했지만, 전설에 따르면 롯데칠성은 의도적으로 맛을 어딘가 부족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롯데칠성은 막강한 유통망을 이용해 스프라이트가 시장에 깔리기도 전에 전국에 ‘스프린트’를 살포했습니다. 소비자들은 ‘스프린트’를 스프라이트로 오인하고 맛본 뒤 “스프라이트, 별거 아니네"라는 실망스러운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기습 작전으로 치명상을 입은 스프라이트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굴욕적으로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습니다. 이는 현지 챔피언의 유통망과 기지가 글로벌 거인의 자본을 이긴 전설적인 ‘게릴라전’ 사례로 남았습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 제로 칼로리 대전

수년 후, 복수의 칼을 갈고 돌아온 스프라이트는 다른 전략을 택했습니다. ‘국민 사이다’의 자리를 뺏는 대신, 청하, 박재범 등 당대 가장 ‘힙한’ 아티스트를 모델로 내세우며 젊고 트렌디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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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20년대, 전쟁은 ‘제로 칼로리’ 시장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칠성사이다 제로’와 ‘스프라이트 제로’**는 건강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다시 한번 격돌했습니다.

제로 칼로리 시장에서 다시 만난 두 라이벌.
제로 칼로리 시장에서 다시 만난 두 라이벌.

두 ‘제로’의 맛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칠성사이다 제로’는 원조의 정체성을 살려 더 강하고 날카로운 탄산감을, ‘스프라이트 제로’는 상대적으로 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비교/대안

칠성사이다 vs 스프라이트: 세기의 라이벌 전격 비교

두 음료는 탄생 배경부터 정체성, 맛까지 모든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구분칠성사이다스프라이트
탄생1950년, 대한민국 서울1959년, 서독 / 1961년, 미국
탄생 서사민족의 재기: 실향민들이 전쟁 속에서 피워낸 희망의 상징기업의 전략: 코카콜라가 경쟁사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 상품
핵심 정체성순수 & 향수: ‘국민 사이다’, 맑고 깨끗함, 한국인의 추억젊음 & ‘쿨함’: 트렌디, 힙합, 글로벌, 스트리트 문화의 아이콘
대표 슬로건“맑고 깨끗하게”“Obey Your Thirst (네 갈증에 복종하라)”
문화적 연관성가족 모임, 한식, 공중목욕탕힙합, 농구, K팝 아이돌
맛의 특징더 강하고 날카로운 탄산감, 깔끔한 레몬-라임 맛부드러운 탄산감, 더 달콤하고 라임 향이 강조된 맛
결정적 순간70년 이상 시장 1위, 문화적 아이콘으로 등극1992년 ‘스프린트’ 사건으로 철수 후 전략적 재진출

결론

인천의 작은 공장에서 시작해 글로벌 제로 칼로리 전쟁터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이다의 120년 역사는 한국 현대사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 톡 쏘는 라이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합니다.

  • 핵심 요약:

    1. 이름의 역사성: 우리가 마시는 ‘사이다’는 본래의 의미(사과주)에서 벗어나,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을 통해 재정의된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 대조적인 정체성: 칠성사이다는 민족의 역사와 함께 성장한 ‘국민 브랜드’인 반면, 스프라이트는 치밀한 기업 전략과 트렌디한 문화 마케팅으로 성장한 ‘글로벌 브랜드’입니다.
    3. 현재 진행형 라이벌: 1992년의 ‘스프린트’ 사건부터 현재의 ‘제로 칼로리’ 시장 경쟁까지, 두 거인의 대결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굳건한 ‘국민 사이다’와 세련된 ‘글로벌 도전자’의 대결 덕분에, 맑고 투명한 탄산음료의 세계는 앞으로도 결코 심심할 틈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의 선택은 어느 쪽인가요?

참고자료
#사이다#스프라이트#칠성사이다#롯데칠성#음료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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