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옛날, 귀한 얼음 한 조각
여러분, 무더운 여름날 우리를 구원해 주는 시원한 빙수 한 그릇, 이 빙수가 사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빙수의 여권에 첫 도장이 찍힌 곳은 놀랍게도 기원전 3000년경의 중국이라고 해요.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눈이나 얼음을 잘게 부수어 그 위에 꿀과 과일즙을 얹어 먹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 저 멀리 로마 제국에서도 황제는 노예들을 시켜 높은 산에서 귀한 눈을 가져오게 한 뒤 과일즙을 섞어 즐겼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더위를 피하고픈 마음은 똑같았나 봅니다. 하지만 냉장고가 없던 시절, 얼음은 그야말로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죠. 아무나 즐길 수 없는, 아주 특별하고 귀한 디저트였답니다.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간 달콤한 얼음
시간이 흘러 얼음 디저트는 각 나라의 문화와 만나며 자신만의 색깔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 일본의 ‘카키고리(かき氷)’: 7세기에서 9세기경, 일본의 귀족들은 ‘카키고리’라는 얼음 디저트를 즐겼습니다. 훗날 하와이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이 문화를 가져갔고, 현지 과일즙과 만나 오늘날 하와이의 명물인 ‘셰이브 아이스(Shave Ice)‘가 탄생했죠.
카키고리\\(かき氷\\) - 다양한 아시아의 빙수: 중국과 대만에서는 과일과 젤리 등을 듬뿍 올린 ‘바오빙(刨冰)’, 필리핀에서는 여러 재료를 섞어 먹는 ‘할로할로(Halo-Halo)‘가 사람들의 더위를 식혀주었답니다.
바오빙
19세기에 들어 얼음을 가는 기계가 발명되고, 20세기에는 인공적으로 얼음을 만들 수 있게 되면서 빙수는 드디어 귀족의 디저트에서 모두가 즐기는 대중적인 간식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한국의 빙수, 그 특별한 발자취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빙수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요? 우리의 빙수 이야기 역시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 조선시대, 석빙고의 얼음별미
조선시대의 왕과 관리들은 ‘석빙고(石氷庫)‘라는 천연 냉장고에 보관해둔 귀한 얼음을 잘게 부숴 과일을 얹어 먹었다고 해요. 마치 과일 화채처럼 즐기는, 선택받은 소수만을 위한 여름 별미였죠.
# 팥빙수의 등장과 대중화
오늘날 우리가 ‘빙수’하면 떠올리는 팥빙수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얼음팥(氷あずき)‘이 들어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잘게 간 얼음 위에 달콤한 팥을 올린 이 새로운 디저트는 곧 많은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았죠.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군을 통해 연유, 초콜릿 시럽, 젤리 등 서양의 재료들이 들어오면서 팥빙수는 더욱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현대 빙수 연대기: 팥빙수에서 눈꽃빙수까지
단순한 얼음과자를 넘어, 시대의 문화와 유행을 담아온 한국 현대 빙수의 화려한 변천사를 시대별로 따라가 볼까요?
# 1980년대: 고급 디저트의 탄생, ‘밀탑’
1980년대, 팥빙수는 ‘고급 디저트’로 화려하게 데뷔합니다. 그 중심에는 1985년, 압구정 현대백화점에 문을 연 **밀탑(Mealtop)**이 있었죠. 당시의 빙수가 젤리, 후르츠 칵테일 등 여러 재료를 푸짐하게 올리는 스타일이었다면, 밀탑은 곱게 간 우유 얼음 위에 정성껏 만든 팥과 쫀득한 찹쌀떡만을 올린 ‘밀크빙수’를 선보였습니다. 이 단순하지만 완벽한 조합은 팥빙수를 고급 디저트 반열에 올려놓았고, ‘밀탑’은 오늘날까지도 ‘팥빙수의 정석’으로 불리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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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상큼함의 시대, 과일빙수의 약진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빙수는 새로운 주인공을 맞이합니다. 바로 ‘과일’이죠. 특히 숙명여대 앞 ‘와플하우스’ 등으로 대표되는 가게들의 딸기빙수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신선한 과일이 듬뿍 올라간 상큼한 빙수는 젊은 세대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가정용 빙수기가 보급되면서 집에서 각자의 스타일대로 빙수를 만들어 먹는 문화가 퍼지기도 했습니다.
# 2000년대: 개성의 폭발, 퓨전빙수의 등장
새로운 세기가 열린 2000년대, 카페 문화가 확산되면서 빙수는 더욱 과감하고 개성 넘치는 모습으로 변신합니다. 쌉쌀한 녹차빙수, 진한 커피빙수, 그리고 치즈케이크나 브라우니를 올린 퓨전빙수들이 등장했죠. 각 프랜차이즈 카페와 개인 카페들은 저마다의 시그니처 빙수를 내놓으며 사람들의 발길을 끌었습니다.
# 2010년대 이후: 빙수 혁명, ‘설빙’과 전문점 시대
2010년대는 가히 ‘빙수 혁명’의 시대였습니다. 그 혁명을 이끈 주역은 2013년 부산에서 시작된 코리안 디저트 카페 **설빙(Sulbing)**이었죠. 설빙은 우유를 곱게 갈아 만든 ‘눈꽃얼음’ 위에 팥 대신 고소한 인절미 콩가루와 쫀득한 인절미를 올린 **‘인절미설빙’**으로 대한민국에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팥 없는 빙수는 상상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혁신이었죠.
설빙의 성공 이후, 동빙고처럼 전통 팥의 맛을 고수하는 가게부터 망고, 멜론 등 프리미엄 생과일을 통째로 올린 호텔 빙수까지, 빙수 전문점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이제 빙수는 단순한 간식을 넘어 하나의 ‘요리’로 자리 잡으며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디저트 문화로 발전했답니다.
아주 먼 옛날, 한여름의 귀한 사치품이었던 차가운 얼음 한 조각. 그것은 시간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우리 곁에서 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달콤하고 시원한 행복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올여름, 여러분의 추억이 담긴 빙수 한 그릇과 함께 이 길고도 달콤한 이야기를 한번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