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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원 이야기에 집착하는 이유: 신화부터 과학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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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창조 신화와 현대 과학을 통해 인류의 근원적 서사 탐구의 여정을 따라가 봅니다.

  • 다양한 문화권의 세계 창조 신화 유형과 그 공통점
  • 빅뱅부터 생명 탄생까지, 과학이 들려주는 우주의 기원 이야기
  • 기원 이야기가 사회 질서와 개인의 정신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

이야기하는 존재, 인간의 기원 이야기 탐구

인류는 이야기하는 존재, 즉 **‘호모 나랜스(Homo Narrans)’**입니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혼돈스러운 경험의 조각들을 의미 있는 질서로 엮어내려는 충동은 인류의 가장 깊은 본능 중 하나죠. 바로 이 본능을 움직이는 엔진이 ‘기원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입니다.

인지과학에 따르면, 우리 뇌는 정보를 인과관계를 가진 서사 구조로 정리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야기는 복잡한 정보를 압축하고 타인의 경험에 공감하게 하는 효율적인 생존 도구였죠. 더 깊은 차원에서 기원 이야기는 죽음의 공포를 관리하는 심리적 방어기제이기도 합니다.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우주의 기원, 삶의 목적을 설명하는 문화적 세계관을 구축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기원 이야기의 창조는 인간의 생존과 정신적 안녕에 필수적인 **‘서사의 필연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지창조를 묘사한 예술 작품
기원 이야기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류의 보편적 욕구를 반영합니다.

신화 속 기원 이야기: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세계 각지의 창조 신화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구조와 **원형(archetype)**을 공유합니다. 이는 인류가 어디에 있든 우주의 기원이라는 거대한 질문에 대해 비슷한 방식으로 사유했음을 보여줍니다.

세계 창조 신화 원형 비교 분석

문화권핵심 원형창조 방식 및 결과
그리스-로마혼돈으로부터의 생성텅 빈 심연(카오스)에서 신들이 자연 발생하고, 세대 간 투쟁을 통해 역동적인 세계가 형성됩니다.
이집트심연으로부터의 생성원시의 물(눈)에서 언덕이 솟고, 자웅동체 신 아툼이 스스로 신들을 낳아 질서(마아트)를 세웁니다.
아브라함 계통무로부터의 창조(Ex Nihilo)유일신이 말씀(Fiat)으로 세상을 창조하며, 창조주와 피조물의 명확한 구분이 있는 위계적 질서가 특징입니다.
중국우주적 알 & 거인의 희생혼돈의 알에서 태어난 거인 반고가 천지를 분리하고, 죽어서 그의 몸이 세상 만물이 됩니다.
북유럽거인의 희생신들이 거인 이미르를 살해하고 그의 시신으로 세계를 만들며, 투쟁적이고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힌두교거인의 희생 & 순환원초 인간 푸루샤의 제의적 희생을 통해 우주와 사회 계급(바르나)이 동시에 창조됩니다.
한국천지 분리 & 경쟁하는 신거인신 미륵이 하늘과 땅을 분리하지만, 교활한 석가에게 세상을 빼앗겨 현세의 불완전성을 설명합니다.

혼돈과 심연에서 태어난 세상

가장 보편적인 유형은 세상이 질서 없는 원초적 상태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카오스(Chaos)**는 ‘텅 빈 공간’으로, 이곳에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이집트 신화에서는 원시의 물 **눈(Nun)**에서 창조가 시작되죠. 이는 질서와 혼돈의 영원한 순환을 상징합니다. 반면, 아브라함 계통 종교의 ‘무(無)로부터의 창조(ex nihilo)‘는 유일신이 의지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있는 선형적 시간관을 보여줍니다.

우주적 알과 희생된 창조주

또 다른 강력한 원형은 원초적 존재의 희생을 통해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은 거인 **이미르(Ymir)**를 살해하고 그의 시신으로 세상을 만듭니다. 중국의 반고(盤古) 역시 죽어서 그의 몸이 세상 만물이 되죠.

특히 힌두교의 푸루샤(Purusha) 신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원초 인간 푸루샤의 희생을 통해 우주 만물이 창조될 뿐만 아니라, 그의 신체 각 부위에서 네 개의 사회 계급(바르나)이 탄생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사회 질서를 우주적 질서와 동일시하며 카스트 제도의 신성한 기원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했습니다. 이처럼 ‘희생’ 모티프는 창조가 파괴나 희생이라는 대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심오한 세계관을 반영하며, ‘무로부터의 창조’와는 다른 순환적이고 유기적인 우주관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과학의 기원 이야기: 빅뱅에서 생명의 탄생까지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기원 이야기는 경험적 증거와 수학적 논리에 기반한 과학적 우주론입니다. 이 과학적 서사는 신성한 의지나 목적이 아닌, 보편적인 물리 법칙과 우연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주가 진화해왔다고 설명합니다.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촬영한 우주 심연
과학은 관측 가능한 증거를 통해 우주의 기원을 추적합니다.

과학의 창세기는 약 138억 년 전 **빅뱅(Big Bang)**으로 시작됩니다. 공간과 시간 자체가 폭발적으로 팽창한 이 사건의 결정적 증거는 초기 우주의 ‘잔광’인 **우주배경복사(CMB)**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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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으로 만들어진 수소와 헬륨은 뭉쳐 최초의 별들을 탄생시켰습니다. 별의 내부 용광로인 항성 핵융합을 통해 탄소와 산소가, 그리고 거대한 별의 마지막 순간인 초신성(supernova) 폭발을 통해 금이나 우라늄 같은 무거운 원소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별의 먼지’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인 셈이죠.

그렇다면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과학은 이 과정을 **화학 진화(chemical evolution)**로 설명합니다. 최근에는 에너지와 화학 물질이 풍부한 심해 열수구가 생명의 요람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또한 유전 정보(DNA)와 생화학 반응(단백질)의 딜레마는, 유전과 촉매 기능을 모두 가진 RNA가 먼저였다는 **‘RNA 세계 가설’**로 설명됩니다.

과학적 기원 이야기는 신화와 달리 ‘목적’이 아닌 **‘우연성’**과 **‘창발’**의 서사를 제시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미리 정해진 계획이 아닌, 수많은 우연의 연속 끝에 나타난 놀라운 결과라는 것이죠.

기원 이야기의 힘: 사회와 정신을 구축하는 청사진

기원 이야기는 과거에 대한 설명을 넘어, 현재의 사회를 구축하고 개인의 정신 세계를 형성하는 강력한 ‘사회적 청사진’이자 ‘정신의 지도’ 역할을 합니다.

힌두교의 푸루샤 신화가 카스트 제도를 정당화하고, 중국의 천명사상이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했던 것처럼 말이죠. 성경 창세기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구절은 서구의 환경 윤리에,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 이야기는 인간의 결함을 설명하는 원죄 개념을 통해 서구 사회 구조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정신분석가 칼 융은 신화가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보았습니다. 비교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전 세계 신화들이 ‘분리-입문-귀환’이라는 공통된 서사 구조, 즉 **‘영웅의 여정(Hero’s Journey)’**을 따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겪는 성장 과정을 우주적 차원에서 투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기원 이야기: 인류는 어디로 향하는가?

신화적 서사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현대에도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미래 도시와 기술의 발전
기술의 발전은 '인간'과 '기원'의 정의를 다시 쓰게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의 디지털 민속인 SCP 재단이나, 슈퍼히어로라는 ‘새로운 신들’을 통해 현대 사회의 딜레마를 탐구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는 오늘날의 신화라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MCU의 타노스가 우주적 균형을 위해 인구의 절반을 없애려 했던 모습에서, 고대 신화의 파괴와 창조가 공존하는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더 나아가 유전자 편집 기술 **크리스퍼(CRISPR)**는 인류를 기원 이야기의 ‘산물’에서 ‘저자’의 위치로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인공일반지능(AGI)**의 출현 가능성, 화성 식민지 건설, 그리고 우리의 우주가 무수히 많은 우주 중 하나일 뿐이라는 다중우주(Multiverse) 가설은 ‘절대적인 기원 이야기’를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의 이야기’로 바꾸며 우리의 세계관을 근본부터 뒤흔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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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인류의 기원 이야기는 시대와 문화를 넘어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이 기나긴 여정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서사의 필연성: 인간은 혼돈 속에서 의미를 찾고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본능적인 존재입니다.
  • 신화에서 과학으로: 기원을 설명하는 방식은 신의 의지에서 보편적인 물리 법칙으로 변화했지만, 세상을 이해하려는 근본적인 욕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 진화하는 이야기: 유전공학, 인공지능, 우주 탐사 기술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기원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결국 인류의 미래는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고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하는 기원 이야기를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시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공유해주세요.

참고자료
#기원이야기#창조신화#우주론#빅뱅이론#신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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