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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바꾼 만두 이야기

pho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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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실 문 너머의 낯선 세상

혹시 2010년 무렵, 미국의 슈퍼마켓 냉동 코너를 기억하시나요? 지금처럼 전 세계의 맛있는 음식이 가득 차 있기 전, 그곳은 꽤나 익숙한 풍경이었어요. 문을 열면 차가운 공기와 함께 늘 그 자리에 있던 냉동 피자, 라자냐, 마카로니 앤 치즈 같은 음식들이 우리를 맞이했죠. 아주 가끔 ‘이국적인’ 코너가 있다 해도, 미국식으로 변형된 볶음밥이나 달콤한 치킨 요리가 전부였답니다.

2010년대 미국 슈퍼마켓의 냉동 코너. 피자, 라자냐 등 익숙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2010년대 미국 슈퍼마켓의 냉동 코너. 피자, 라자냐 등 익숙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때 우리는 조금씩 똑똑한 소비자가 되어가고 있었어요. 2008년 금융 위기를 겪으며 외식 대신 집에서 요리하는 날이 많아졌고, 무조건 양이 많은 것보다 가격 대비 품질, 즉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했죠. 더 나아가 유기농이나 지역 생산 제품에 대한 관심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어요. 편리함의 대명사였던 냉동식품 코너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겁니다. 편리하면서도 건강과 품질을 놓치고 싶지 않은 소비자들이 늘어난 거죠.

그 시절 ‘한식(K-food)‘은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미지의 영역이었어요.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의 코리아타운에 가야만 맛볼 수 있는, 마음먹고 찾아가야 하는 특별한 음식이었죠. 물론 ‘로이 최’ 같은 셰프가 김치 타코 푸드트럭으로 큰 인기를 끌며 한식의 가능성을 보여주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의 냉동식품이 미국 주방의 필수품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하지만 ‘비비고’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바로 그 변화의 물결에 가장 현명하게 올라탔습니다. 새로운 파도를 만드는 대신, 이미 시작된 파도를 정확히 읽고 그 위에서 가장 멋진 춤을 춘 것이죠.

***

1장: 첫 만남, 찜기 속 트로이의 목마

비비고의 미국 도전이 처음부터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에요. 처음에는 비빔밥 같은 대표 메뉴를 내세운 레스토랑을 열고, 김치나 고추장을 알리려 노력하는 교과서적인 방법을 썼죠.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어요.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돌솥비빔밥은 어떻게 먹어야 할지 막막했고, 고추장 한 통을 사도 어떻게 요리에 써야 할지 알기 어려웠으니까요. ‘한식을 가르치겠다’는 접근은 문화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바로 이 실패의 순간, 비비고의 가장 위대한 전환이 시작됩니다. 그들은 ‘한식 세계화’라는 거대한 구호 대신, 아주 구체적이고 모두가 아는 한 가지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바로 **‘만두’**였습니다.

만두는 완벽한 ‘트로이의 목마’였어요. 미국인들은 이미 만두와 비슷한 음식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중국 식당의 팟스티커, 일본의 교자, 심지어 폴란드의 피에로기까지. 비비고는 전혀 새로운 음식을 권하는 대신, 우리가 이미 좋아하는 음식의 ‘더 나은 버전’을 제안한 셈이죠.

코스트코 시식 코너에서 직원이 건네주는 김이 나는 비비고 만두 한 조각.
코스트코 시식 코너에서 직원이 건네주는 김이 나는 비비고 만두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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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의 천재성은 ‘현지화’라는 이름으로 빛을 발했습니다.

  • 맛의 번역: 단순히 한국의 맛을 고집하지 않았어요. 미국인들이 더 건강하다고 여기는 닭고기를 주재료로 쓰고, 낯선 부추 대신 멕시코 음식을 통해 익숙해진 **실란트로(고수)**를 넣었죠. 이 작은 변화는 ‘이건 당신이 먹어본 적 있는 안전하고 맛있는 음식’이라는 신호를 보내는 정교한 전략이었습니다.
  • 장소의 선택: 왜 하필 코스트코였을까요? 코스트코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제품을 ‘경험’하는 공간입니다. 비비고는 비싼 광고 대신, 시식 코너에서 소비자들과 직접 만났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한 조각의 맛있는 경험은 그 어떤 광고보다 강력했죠. 게다가 전자레인지용 찜기 트레이로 조리도 간편하고, 대용량 포장으로 가격까지 합리적이니, 코스트코 고객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춘 셈이었습니다.

비비고는 낯선 한식을 강요하는 대신, 만두라는 익숙한 다리를 놓아 우리를 한식의 세계로 부드럽게 이끌었습니다. 코스트코 시식대 앞에서 만두 한 조각을 집어 드는 그 무의식적인 행동,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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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조용한 침공, “어느새 어디에나 있네”

코스트코에서 시작된 인기는 소문처럼 번져나갔습니다. 처음엔 ‘코스트코에서만 파는 특별 아이템’이었던 비비고 만두가 어느 날 동네 크로거, 월마트에서도 보이기 시작했죠. “어라, 이제 저거 어디에나 있네.” 이 조용한 확산의 뒤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거대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 비밀 병기는 바로 2019년, 미국의 거대 냉동식품 기업 ‘슈완스 컴퍼니(Schwan’s Company)’ 인수였습니다. 비비고의 모기업 CJ는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전역에 촘촘한 유통망을 가진 이 회사를 사들였습니다. 이는 미국 식품 시장의 판도를 뒤바꾼 결정적인 한 수였죠.

슈완스 인수는 곧 ‘접근성’의 폭발적인 확장을 의미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비비고는 수입 브랜드에서 네슬레나 타이슨 같은 거대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내 강자로 변신했습니다. 슈완스의 유통망을 통해 무려 3만 개가 넘는 새로운 가게에 비비고 제품이 깔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미국 지도를 배경으로 슈완스의 생산 및 유통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그려진 이미지.
미국 지도를 배경으로 슈완스의 생산 및 유통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그려진 이미지.

그 효과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 인수 후 단 2년 만에 CJ의 미국 식품 매출은 10배 가까이 성장했습니다.
  • 오랜 기간 시장 1위였던 일본의 아지노모토를 제치고 미국 아시안 푸드 시장의 새로운 왕좌에 올랐습니다.

더 나아가 비비고는 슈퍼마켓의 풍경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냉동 코너에 **‘아시안 데스티네이션(Asian Destination)’**이라는 특화 구역을 만들어, 흩어져 있던 아시안 푸드를 한곳에 모은 것이죠. 쇼핑객들은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제품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한곳에서 편안하게 아시안 푸드를 탐색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맨땅에서부터 유통망을 까는 대신, 이미 완성된 인프라를 통째로 사들인 것입니다. 만두라는 제품 선택 다음으로, 비비고가 내린 가장 영리하고 결정적인 한 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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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티핑 포인트, 르브론의 유니폼에서 ‘Bibigo’를 본 날

모든 브랜드에는 소수의 팬을 넘어 대중 모두에게 각인되는 결정적인 순간, 즉 ‘티핑 포인트’가 있습니다. 비비고에게 그 순간은 2021년, 우리가 LA 레이커스의 상징적인 유니폼에서 선명한 ‘Bibigo’ 로고를 발견했을 때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광고가 아니라, 식료품 코너에 있던 브랜드가 미국 문화의 심장부에 등장한 문화적 사건이었습니다.

르브론 제임스가 ‘Bibigo’ 로고가 새겨진 LA 레이커스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는 모습
르브론 제임스가 'Bibigo' 로고가 새겨진 LA 레이커스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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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사실은, 이 5년간 1억 달러가 넘는 거대한 파트너십을 먼저 제안한 쪽이 비비고가 아니라 LA 레이커스였다는 점입니다. LA 레이커스는 K-컬처의 성장과 함께 세계로 뻗어 나가는 비비고의 잠재력을 먼저 알아본 것이죠. 힘의 균형이 완전히 역전된 순간이었습니다.

이 파트너십은 단순한 로고 노출을 넘어 **‘정체성의 전이’**를 가져왔습니다. 르브론 제임스와 같은 슈퍼스타가 뛰는 LA 레이커스와 손을 잡음으로써, 비비고는 탁월함, 세계적인 인기, 다문화적인 에너지 같은 가치들을 브랜드에 그대로 흡수했습니다. 이로써 한식은 더 이상 특정 민족의 음식이 아닌, 세계 문화의 주류임을 당당히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비비고의 미국 공략 3단계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접근성 (Accessibility): 코스트코에서 맛과 편리함으로 장벽을 허물고,
  2. 유효성 (Availability): 슈완스 인수로 미국 어디서나 살 수 있게 만들고,
  3. 열망 (Aspiration): LA 레이커스 파트너십으로 모두가 선망하는 브랜드로 거듭난 것입니다.

르브론의 유니폼에 새겨진 로고를 본 순간, 비비고는 의심의 여지 없이 미국 문화 풍경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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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비비고의 세상, 냉동실에서 SNS 피드까지

이제 우리는 완전히 ‘비비고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만두의 성공을 발판 삼아, 비비고는 우리의 식탁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점령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비비고는 ‘그 만두 브랜드’가 아닙니다.

만두로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제 바삭한 크런치 치킨, 간편한 볶음밥과 덮밥, 심지어 떡볶이와 한국식 핫도그 같은 ‘K-스트리트 푸드’까지 선보이며 더 넓은 한식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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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비고의 진짜 영리함은 제품을 우리 집에 들여놓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이걸로 뭘 해 먹지?’**라는 우리의 질문에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답을 줍니다.

떡볶이 까르보나라, 고추장 글레이즈 베이컨 샌드위치 등 비비고 제품을 활용한 먹음직스러운 퓨전 요리
떡볶이 까르보나라, 고추장 글레이즈 베이컨 샌드위치 등 비비고 제품을 활용한 먹음직스러운 퓨전 요리

비비고의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은 창의적인 레시피로 가득한 놀이터 같아요. 단순히 만두 굽는 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떡볶이 까르보나라’나 ‘고추장 쿠키’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퓨전 레시피를 끊임없이 제안하죠. 이를 통해 우리는 단순한 소비자에서, 비비고와 함께 요리를 즐기는 커뮤니티의 일원이 됩니다. 제품을 한 번 사게 만드는 것은 ‘거래’지만, 그 제품을 일상에서 다양하게 즐기도록 만드는 것은 ‘관계’를 맺는 일이니까요.

***

결론: 한 끼 식사를 넘어선 마스터클래스

비비고가 걸어온 길은 단순히 한 식품 브랜드의 성공 스토리를 넘어섭니다. 이것은 문화와 비즈니스 전략이 어떻게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명품 강의와도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대신, 시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기꺼이 스스로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만두라는 다리를 놓아, 낯선 한식의 세계로 우리를 부드럽게 이끌었죠.

이것은 정교한 전략과 문화적 존중,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맛있는 만두 하나가 가진 강력한 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저녁 우리 집 냉동실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 비비고 만두가 있다면, 우리는 단지 간편한 한 끼 식사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이 놀라운 이야기의 한 페이지를 함께 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비비고#K-푸드#한식세계화#만두#코스트코#현지화전략#슈완스#LA레이커스#마케팅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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