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은빛 제국, 참치는 어떻게 평범한 통조림과 최고급 사치품이라는 두 얼굴을 갖게 되었을까요?
-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된 참치와 인류의 깊은 인연을 알아봅니다.
- 전쟁과 기술이 낳은 발명품, 참치 통조림의 탄생 비화를 살펴봅니다.
- 동원과 사조, 대한민국 참치 역사를 쓴 두 거인의 성공 신화를 비교합니다.
-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참치 완전양식 기술의 현재와 과제를 짚어봅니다.
한 캔의 통조림과 한 점의 오도로, 두 얼굴의 생선
우리에게 참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나요? 아마 많은 분들이 찬장 한구석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노란색 캔, ‘동원참치’나 ‘사조참치’를 떠올릴 겁니다. 출출할 때 밥에 비벼 먹거나, 얼큰한 김치찌개에 넣어 감칠맛을 더하는, _우리네 일상에 깊숙이 자리한 서민적인 식재료_의 모습이죠.
그런데 여기, 참치의 또 다른 얼굴이 있습니다. 새해 첫날, 동이 트기도 전부터 열기로 가득한 일본 도쿄의 도요스 수산시장. 수많은 취재진의 플래시 세례 속에서 거대한 참다랑어 한 마리가 경매에 오릅니다. 쩌렁쩌렁한 경매사의 외침이 끝나고 마침내 발표된 낙찰가. 무려 2억 700만 엔, 우리 돈으로 약 20억 원에 육박하는, 상상조차 힘든 금액입니다. 단 한 점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횟감, 미식의 정점에 선 사치품으로서의 참치입니다.
어떻게 하나의 생선이 이토록 극단적인 두 개의 얼굴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요? 저렴한 통조림부터 수십억 원짜리 횟감까지, 참치는 어떻게 인류의 식탁 양극단을 모두 지배하게 된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단순히 한 생선의 역사를 넘어, 인류 문명의 발전, 기술의 혁신, 그리고 욕망의 변화를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지금부터 바다의 은빛 제국, 참치가 걸어온 위대한 대서사시를 시작합니다.
시대 구분 | 주요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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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 한반도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참치뼈 발견, 선사시대부터 참치 섭취 추정 |
고대 로마 | 지중해 연안에서 조직적인 참치 어업 및 가공, ‘가룸(Garum)’ 소스 교역 |
1804년 | 프랑스의 니콜라 아페르, 나폴레옹의 현상 공모에 응해 병조림 기술 발명 |
1903년 | 미국 캘리포니아, 정어리 대신 잡힌 참치로 세계 최초의 참치 통조림 생산 |
1957년 |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 ‘참치’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어획 성공 |
1969년 | ‘캡틴 킴’ 김재철, 동원산업 창업 |
1970년 | 일본 긴키대학, 참다랑어 완전양식 연구 프로젝트 시작 |
1971년 | 주인용, 사조산업 설립 (시전사에서 사명 변경) |
1982년 | 동원산업, 국내 최초의 참치 통조림 ‘동원참치’ 출시 |
2002년 | 긴키대학, 32년간의 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참다랑어 완전양식 성공 |
2019년 | 도요스 시장 새해 첫 경매에서 참다랑어 한 마리가 역대 최고가 3억 3,360만 엔 기록 |
제1장: 바다의 황제, 인류의 식탁에 오르다: 고대 로마부터 신석기 한반도까지
참치와 인류의 인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깁니다. 그 거대한 몸집과 폭발적인 힘을 가진 바다의 포식자를 식탁에 올린다는 것은, 단순히 식량을 확보하는 것을 넘어 _그 사회의 기술력과 조직력을 증명하는 척도_와도 같았습니다.
고대 로마는 가히 ‘참치의 제국’이라 부를 만했습니다. 로마의 어부들은 지중해로 나아가 참치를 사냥했고, 해안가 수백 곳에 세워진 가공 공장에서는 잡힌 참치를 소금에 절여 제국 전역으로 보냈습니다. 특히 참치의 내장 등을 발효시켜 만든 어장(魚醬)인 **‘가룸(Garum)’**은 로마인들의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조미료였죠. 화산재에 묻혔던 폼페이 유적에서 가룸 항아리가 발견될 정도로, 참치는 로마의 식문화와 경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거대한 바다의 포식자를 길들인 역사는 로마보다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선을 한반도로 돌려볼까요? 부산 영도 해안에 위치한 동삼동 패총 유적지에서 고고학자들은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 사이에서 나온 **‘참치뼈’**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선조들이 이미 거친 바다로 나아가 참치를 사냥할 수 있는 항해술과 어로 기술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제2장: 전쟁과 혁신이 낳은 발명품: 참치 통조림의 탄생
오늘날 우리가 참치를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난 한 발명 덕분이었습니다. 이야기는 19세기 초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시작됩니다. 병사들에게 신선한 식량을 장기간 공급할 방법이 절실했던 그는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식품 장기 보존 기술을 공모했습니다.
이때, 파리의 제과점 주인이던 니콜라 아페르는 음식물을 유리병에 넣고 밀봉한 뒤 끓는 물에 가열하면 음식이 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해 ‘병조림’ 기술을 발명합니다. 세균을 몰랐던 시절, 경험을 통해 살균과 밀봉의 원리를 터득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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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1903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정어리 통조림 공장이 위기에 봉착합니다. 정어리 대신 그물에 가득했던 날개다랑어를 속는 셈 치고 통조림으로 만들었는데, 푹 익힌 참치 살이 닭고기처럼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을 냈습니다. 여기서 **“바다의 닭고기(Chicken of the Sea)”**라는 기가 막힌 마케팅 문구가 탄생했고, 참치 통조림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참치 통조림은 참호 속 병사들에게 저렴하고 영양가 높은 단백질 공급원으로 각광받으며 엄청난 양이 군납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참치 통조림은 군용 식량을 넘어 미국인들의 소울 푸드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야말로 _식문화의 혁명_이었습니다.
제3장: 망망대해를 호령한 캡틴들: 동원과 사조, K-참치 신화의 서막
미국에서 시작된 참치 통조림의 물결은 태평양을 건너 대한민국에 상륙하며, 두 명의 걸출한 인물을 통해 우리만의 신화를 써 내려가게 됩니다. 바로 동원의 김재철과 사조의 주진우, 바다를 무대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한 두 거인이었습니다.
3.1. ‘캡틴 킴’의 위대한 항해, 동원 김재철
동원의 역사는 ‘캡틴 킴’ 김재철이라는 한 남자의 바다 이야기 그 자체입니다. 원양어선 선장으로 명성을 떨친 그는 1969년, 35세의 나이에 동원산업을 창업합니다. 담보 하나 없이 오직 ‘캡틴 킴’이라는 신용 하나만으로 일본에서 배 두 척을 빌려 사업을 시작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의 인생 전환점은 미국 하버드대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찾아옵니다. “국민소득 2천 달러가 넘는 국가에서는 참치가 대중화된다"는 이론을 접한 그는, 당시 막 2천 달러 문턱을 넘어서던 대한민국 시장을 떠올렸습니다. 전량 수출하던 참치를 국내용 통조림으로 만들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렇게 1982년, 대한민국 최초의 살코기 참치캔 **‘동원참치’**가 세상에 나옵니다.
초기 판매 부진을 겪자, 전 직원이 시식 행사에 매달렸습니다. 특히 참치를 넣어 끓인 ‘참치 김치찌개’ 레시피를 적극적으로 알리며 참치캔을 한국인의 밥상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습니다. _현장에서 답을 찾은 선장 출신 경영인의 뚝심_이 만들어낸 성공 신화였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참치 김치찌개의 맛을 잊을 수 없는데, 이 음식이 한 경영인의 혜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3.2. 정치학도, 원양어업의 승부사가 되다, 사조 주진우
동원의 김재철이 ‘야전 사령관’이었다면, 사조의 주진우는 ‘전략가’였습니다.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며 대통령을 꿈꾸던 그는 1979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29세의 나이에 회사를 물려받게 됩니다.
바다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그는 탁월한 경영 감각으로 위기를 수습했습니다. 특히 위기에 빠진 기업들을 인수합병(M&A)하며 덩치를 키우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그는 사조해표, 사조대림, 오양수산 등 굵직한 식품 기업들을 차례로 인수하며 사조그룹을 종합식품그룹으로 성장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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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고양이도 외면하던 뱃살, 미식의 정점이 되다: 참치회의 고급화
참치 통조림이 대중의 식탁을 점령하는 동안, 일본에서는 참치의 기름진 뱃살, ‘토로(トロ)‘가 전혀 다른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최고급 부위의 대명사지만, 불과 100여 년 전 에도 시대 일본에서 토로는 지방이 많아 쉽게 상하고 비린내가 나 **‘네코마타기(猫またぎ)’, 즉 ‘고양이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부위’**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이 천덕꾸러기 뱃살이 어떻게 미식의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을까요? 해답은 사람들의 입맛 변화가 아닌, **‘기술의 발전’**에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냉동 기술과 전국을 잇는 저온 유통 시스템, 즉 ‘콜드체인(cold chain)‘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원양어선에서 잡자마자 참치를 영하 60도로 급속 냉동시키자, 부패의 원인이었던 지방은 오히려 그 풍미를 완벽하게 보존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의 단점이 기술 덕분에 _‘입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움과 고소함’_이라는 최고의 장점으로 탈바꿈한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에 일본의 경이적인 경제 부흥이 기름을 부었습니다.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 사람들이 더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찾기 시작했고, 화려한 마블링을 자랑하는 토로는 부와 미식의 상징으로 떠올랐습니다. 매년 1월 도쿄 도요스 수산시장에서 열리는 새해 첫 참치 경매에서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기록적인 경매가가 나오는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입니다.
제5장: ‘바다의 포르쉐’를 길들이다: 참치 양식 기술의 발전
전 세계적으로 참치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남획으로 인한 자원 고갈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인류는 이제 ‘사냥꾼’에서 ‘농부’로의 전환을 모색해야만 했습니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에 가장 먼저 뛰어든 곳은 일본의 긴키(近畿, Kindai)대학이었습니다. 1970년, 긴키대학 수산연구소는 참다랑어의 ‘완전양식’ 연구에 착수합니다. 완전양식이란, 인공적으로 부화시킨 치어를 성체로 키워 다시 알을 낳게 하고, 그 알에서 다음 세대를 키워내는, 자연산 자원에 의존하지 않는 완벽한 순환 사이클을 만드는 기술을 의미합니다.
연구는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지만, 시작 32년 만인 2002년, 마침내 인공 부화 1세대 참치들이 산란에 성공하며 세계 최초로 참다랑어 완전양식에 성공합니다. **생존율 0.0006%**에 불과한, 그야말로 기적 같은 성공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역시 참다랑어 양식 기술 확보에 뛰어들어 2018년 첫 상업 출하에 성공했지만, 아직 대량생산까지는 가야 할 길이 멉니다. 신석기 시대의 참치 사냥은 이제, 바다의 포식자를 가축처럼 길러내는 ‘해양 목축’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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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대안
동원 vs 사조: K-참치 신화의 두 성장 모델
동원과 사조의 역사는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두 가지 전형적인 성장 모델을 보여줍니다. 김재철 회장이 현장 경험과 혁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1세대 창업가 정신을 상징한다면, 주진우 회장은 위기 속 가업을 물려받아 M&A와 같은 현대적 경영 기법으로 기업을 확장시킨 2세대 경영인의 모습을 대표합니다.
구분 | 동원그룹 (김재철) | 사조그룹 (주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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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 배경 | 원양어선 선장 출신 (‘캡틴 킴’) | 정치학을 공부한 학자 출신 2세 경영인 |
창업 철학 |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시장 개척 및 혁신 | 아버지의 유지를 잇는 가업 계승 및 안정화 |
핵심 성장 전략 | 국내 참치 통조림 시장 창출 |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한 규모 확장 |
리더십 스타일 | 바다를 꿰뚫는 현장 전문가형 리더 | 냉철한 판단력의 전략가형 경영자 |
결론
신석기 시대의 사냥감에서 로마의 산업 자원으로, 나폴레옹의 군량미에서 현대인의 밥반찬으로, 그리고 마침내 첨단 생명공학의 대상이 되기까지, 참치가 걸어온 길은 인류 문명 발전사와 그 궤를 같이했습니다.
- 핵심 요점 1: 기술이 가치를 창조하다 병조림 기술은 참치를 대중화했고, 급속 냉동 기술은 버려지던 뱃살을 최고급 미식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참치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핵심 요점 2: 리더십이 시장을 만들다 동원의 김재철과 사조의 주진우, 두 리더의 다른 전략은 대한민국 참치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는 리더의 비전이 산업 지형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입니다.
- 핵심 요점 3: 지속가능성에 대한 질문 폭발적인 수요와 남획 문제 속에서 등장한 완전양식 기술은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자 과제입니다. 참치의 미래는 우리가 자연과 공존할 지혜를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시험대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식탁 위에 놓인 참치캔 하나가 다르게 보이지 않으신가요? 이 작은 캔에는 인류의 위대한 역사와 기술, 그리고 미래를 향한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참고자료
- 동원그룹, 동원참치, 대한민국의 밥상 풍경을 바꾸다
- YouTube, 극한직업 - Extreme JOB_참치 통조림의 탄생_#001
- 조선일보, 日 새해 첫 참치 경매 나온 276㎏ 참다랑어, 낙찰가 무려 20억 육박
- YouTube, 도쿄 첫 참치 경매가 19억 원 넘어…“역대 2번째” [잇슈 SNS] / KBS 2025.01.07.
- 동원그룹, 식탁에 오르기까지 역사 속, 참치의 여정
- Brunch, 낚시와 해양 생물 소비의 역사
- 동원그룹, “펭수참치의 아버지가 나폴레옹이라고?” 통조림, 누가 어떻게 발명한 걸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통조림(桶조림)
- 나무위키, 참치 통조림
- 주간현대, 종합식품기업으로 미래도약…참치원조 ‘동원그룹 이야기’
- 비즈니스포스트, [Who Is ?] 주진우 사조그룹 회장
- 나무위키, 사조그룹
- 제주일보, 2002년 참다랑어 완전양식 성공, 종묘 대량 생산 등 40년 노력의 결실
- YouTube, 한 마리 20억? 일본의 새해 첫 참치 경매는 왜 비쌀까|지금 이 뉴스
- YouTube, 참치는 200년 전에 고양이 먹이었을 뿐이다?
- 식품외식경제, 16억 원짜리 참치 기네스북에 공식 등재
- 해사신문, 통조림부터 고급 횟감까지 입맛 살리는 ‘참치’…잡는 방법도 친환경으로 변해야
- YouTube, 참다랑어 양식 성공을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 KBS뉴스, [취재후] 세계 참다랑어 시장 최후 승자는?…“완전 양식 ‘뻥튀기’ 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