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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의 재정의 -무엇(What)’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떻게(How)’와 ‘왜(Why)’ 만드느냐?

pho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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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대에 오른 푸른 리본

2022년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디지털 아트 부문 1등 수상작 ‘공간 오페라 극장(Théâtre D’opéra Spatial)‘이 공개되었을 때, 그 화려하고 몽환적인 아름다움에 모두가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작가 제이슨 앨런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이내 감탄을 경악과 분노로 바꾸어 놓았죠. “저는 붓을 들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은 AI 미드저니와의 협업입니다.”

바로크 양식 홀의 여성들이 거대한 창밖을 보는 화려하고 신비로운 ‘공간 오페라 극장’
바로크 양식 홀의 여성들이 거대한 창밖을 보는 화려하고 신비로운 '공간 오페라 극장'

이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창의성의 본질을 묻는 거대한 질문을 세상에 던졌습니다. 앨런은 완벽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수백 번의 프롬프트 수정과 수십 시간의 선별, 리터칭을 거쳤다고 항변했습니다. 그에게 AI는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는 최첨단 ‘붓’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예술가들은 그의 ‘노력’이 아닌 ‘과정’의 생략에 분노했습니다. 수년간의 훈련, 재료와의 씨름, 실패의 고통이라는 신성한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물만 손에 넣은 것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었죠.

앨런의 푸른 리본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상자 속에서 쏟아져 나온 질문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습니다. AI는 창작의 도구일까요, 동료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영혼을 베끼는 유령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기록을 살피고, 현재의 현상을 분석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여정을 떠나야 합니다.


제1장: 모든 것을 삼키는 태풍

‘공간 오페라 극장’이 일으킨 파문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창작의 모든 영역에서 AI라는 태풍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믿었던 것들에 거대한 균열을 내며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음악: 유령의 목소리, 영혼의 저작권

2023년, ‘Heart on My Sleeve’라는 노래 한 곡이 음악계를 발칵 뒤집었습니다. 세계적인 팝스타 드레이크와 위켄드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복제한 이 노래는 틱톡과 유튜브에서 순식간에 수천만 조회수를 기록했죠. ‘ghostwriter977’이라는 익명의 제작자가 만든 이 노래는 너무나 진짜 같아서 팬들조차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시작일 뿐, 최근에는 전설적인 래퍼 투팍의 목소리를 학습한 AI가 신곡을 발표하는가 하면, AI 작곡 서비스 ‘AIVA’는 스스로 클래식부터 록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만들어내며 영화음악 감독으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 모방을 넘어, 아티스트의 정체성과 영혼의 고유성마저 복제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공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문학: 펜을 내려놓은 작가들

2023년 할리우드 작가와 배우들이 벌인 대규모 파업의 핵심 쟁의 중 하나는 바로 AI였습니다. 제작사들이 AI를 이용해 시나리오 초안을 쓰거나, 배우의 디지털 이미지를 무단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저항이었죠. 한국의 웹툰계에서도 유명 작가가 AI를 배경 작업에 활용했다고 밝히자 독자들의 거센 비판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AI가 쓴 소설이 공모전 1차 심사를 통과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AI는 이제 이야기의 구조를 학습하고, 인간의 감정선을 흉내 내며 창작의 가장 깊은 영역까지 파고들고 있습니다.

#건축과 디자인: 상상력의 설계자

건축계에서는 이미 AI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건축가 하산 라가브는 AI에게 ‘안토니 가우디 스타일로 지은 고대 이집트 건축물’이라는 상상 속의 주문을 던졌고, AI는 곡선과 자연의 형태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더 이상 개별 건물을 설계하는 수준을 넘어, 도시 전체의 교통 흐름, 일조량, 에너지 효율을 최적화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설계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논란은 이제 특정 장르를 넘어 창작 생태계 전체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개인 창작자의 도구 활용 문제를 넘어, 산업 구조와 저작권, 그리고 창의성의 정의 자체를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제2장: 역사는 말한다, 불안은 반복된다

새로운 기술을 향한 오늘의 불안, 사실은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역사는 비슷한 장면을 이미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듯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창의성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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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 화가의 붓을 해방시키다

1839년, 사진 기술이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 화가 사회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특히 현실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초상화가들은 설 자리를 잃었죠. ‘기계가 그린 그림’ 앞에서 인간의 수고는 무력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위기는 예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시켰습니다.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현실을 ‘똑같이 재현’하는 임무를 사진기에 넘겨주고, 대신 빛의 흔들림, 순간의 인상, 주관적인 감정처럼 사진이 담을 수 없는 내면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사진은 회화를 재현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예술가의 ‘눈’을 밖이 아닌 안으로 돌리게 만든 것입니다.

빛과 색채의 변화를 포착한 모네의 ‘인상, 해돋이’ 그림
빛과 색채의 변화를 포착한 모네의 '인상, 해돋이' 그림

#신시사이저: 오케스트라의 영혼을 확장하다

1960년대, 로버트 무그가 신시사이저를 발명했을 때, 음악계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수많은 연주자가 필요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기계 한 대로 흉내 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죠. ‘영혼 없는 기계 소리’라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이 편견을 깬 것은 웬디 카를로스의 앨범 ‘Switched-On Bach’였습니다. 바흐의 정교한 클래식 음악을 오직 신시사이저로만 연주한 이 앨범은 그래미상을 휩쓸며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차가운 전자 기계가 인간의 영혼을 담은 클래식을 얼마나 풍부하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것입니다. 이후 신시사이저는 록, 팝, 재즈 등 모든 장르로 스며들어 현대 음악의 표현 가능성을 폭발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사진과 신시사이저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패턴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기술은 기존 예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의를 확장하고 인간 창작자들이 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도록 등을 떠민다는 사실을 말이죠. AI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3장: 기계 속 유령과 춤추는 법

모두가 AI를 경계할 때, 일부 예술가들은 기꺼이 유령의 손을 잡고 새로운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AI를 경쟁자가 아닌, 창의적 영감을 주는 파트너로 여기며 협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습니다.

#데이터를 물감 삼아: 레픽 아나돌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은 AI를 그의 가장 중요한 협업 파트너로 삼습니다. 그는 수백만 개의 자연 이미지, 도시의 데이터, 심지어 뇌파 데이터까지 방대한 정보를 AI에게 학습시킨 뒤, 데이터 속에 숨겨진 시적인 패턴을 시각화하는 ‘데이터 조각’을 만듭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데이터는 차가운 숫자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춤을 춥니다. 여기서 AI는 단순히 이미지를 생성하는 도구를 넘어, 인간이 볼 수 없는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새로운 감각 기관이 됩니다.

거대한 벽면을 가득 채운 화려하고 역동적인 데이터 시각화 작품
거대한 벽면을 가득 채운 화려하고 역동적인 데이터 시각화 작품

#나의 목소리를 가진 아이: 홀리 헌든

음악가 홀리 헌든은 자신의 목소리와 대화 스타일을 학습시킨 AI ‘스폰(Spawn)’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스폰을 단순한 음성 변조 프로그램이 아닌, 함께 아이디어를 내고 곡을 만드는 동등한 ‘앙상블 멤버’로 대합니다. 스폰이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사운드에는 홀리 헌든의 삶이 미묘하게 녹아있다고 그녀는 믿습니다. 이는 AI가 단순한 모방을 넘어, 창작자의 정체성을 확장하고 새로운 페르소나를 창조하는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작업은 AI 시대의 예술이 잘 다듬어진 ‘결과물’에서, 그것을 만들어내는 독창적인 ‘과정’과 ‘개념’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술은 이제 ‘무엇(What)’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떻게(How)’와 ‘왜(Why)’ 만드느냐의 문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제4장: 우리가 나아갈 길, 새로운 르네상스를 위한 아이디어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과거의 역사가 그랬듯, AI는 인간 창의성의 종말이 아닌, 새로운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일 수 있습니다. 분석을 통해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몇 가지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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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1: 궁극의 질문 설계자 (The Question Architect)

The Question Architect
The Question Architect
AI가 궁극의 ‘답변 기계(Answer Machine)’라면, 인간은 궁극의 **‘질문 기계(Question Machine)’**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의 창작은 정교한 기술력보다 독창적인 질문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만약 반 고흐가 심해의 풍경을 그린다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고래의 노랫소리로 재해석한다면?’처럼, 기존 데이터에는 없는, 상상력의 경계를 허무는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핵심 역량이 될 것입니다. 창작자는 이제 AI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자, 탐험선을 이끄는 선장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아이디어 2: 과정 자체가 예술이다 (Process as Art)

Process as Art
Process as Art
결과물의 소유권이 모호해지는 시대에는 창작의 ‘과정’ 자체가 하나의 독창적인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제이슨 앨런이 AI와 나눈 600번의 대화, 즉 그의 프롬프트 기록은 ‘공간 오페라 극장’만큼이나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처럼 AI에게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수없이 질문을 다듬고, 실패하고, 방향을 수정하는 치열한 대화의 과정 전체를 기록하고 전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등장할 것입니다.

아이디어 3: 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번역가 (Translator of Hyper-Personal Experiences)

Translator of Hyper-Personal Experiences
Translator of Hyper-Personal Experiences
AI는 수억 개의 데이터를 학습할 수 있지만, 당신이 어제 꾼 꿈, 첫사랑의 기억,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 같은 극히 개인적인 경험은 학습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인간 창의성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자신의 지극히 사적인 경험과 감정을 AI라는 번역기를 통해 세상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예술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라톤 완주 후의 심박수 데이터를 시각 예술로, 이별의 아픔을 담은 일기장을 한 편의 음악으로 변환하는 작업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 4: AI 비평가, 그리고 윤리적 창작자 (The AI Critic & Ethical Creator)

The AI Critic & Ethical Creator
The AI Critic & Ethical Creator
모두가 AI를 활용해 무언가를 만들 때, 오히려 AI 기술 자체를 비판적으로 탐구하고 그 이면의 편향이나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는 예술이 중요해질 것입니다. AI의 학습 데이터에 숨겨진 인종차별적 편견을 시각화하거나, AI가 만들어낸 가짜 뉴스가 퍼지는 과정을 행위 예술로 보여주는 등, 기술에 대한 성찰적 메시지를 던지는 ‘AI 비평 예술’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목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 5: 인간+인간+AI, 창의성의 증폭 (Amplifying Creativity: Human+Human+AI)

Amplifying Creativity: Human+Human+AI
Amplifying Creativity: Human+Human+AI
미래의 가장 위대한 창작물은 한 명의 천재나 하나의 AI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인간들과 AI가 협업하는 ‘켄타우로스’ 팀에 의해 탄생할 것입니다. 철학자가 던진 질문을 데이터 과학자가 AI 모델로 구현하고, 시인이 그 결과물을 해석해 새로운 서사를 부여하는 식의 융합적 창작 방식이 보편화될 것입니다. 이는 창의성의 경계를 허물고, 한 개인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집단 지성의 시대를 열 것입니다.


에필로그: 영혼은 질문에 깃든다

이야기는 다시 제이슨 앨런에게로 돌아갑니다. 그의 모든 작업은 하나의 기묘한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바로크 시대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우주 헬멧을 쓰고 오페라를 본다면 어떨까?”

기계는 스스로 이런 엉뚱하고 아름다운 질문을 던지지 못합니다. 세상에 대한 이해, 삶의 경험, 불완전한 감정에서 비롯되는 호기심.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의 시대,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인간적인 창의성이자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붓은 이제 AI의 손에도 들려있지만, 그 붓을 어디로 향하게 할지, 무엇을 그리게 할지 결정하는 영혼은 여전히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정답이 아닌 위대한 질문에 깃들어 있습니다.

#AI예술#인간창의성#미래예술#기술과예술#창작의미래#생성형AI#AI협업#예술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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