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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날, 인류를 구할 씨앗 금고

pho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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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흙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어본 적 있으신가요? 그 작고 연약한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기적을 말이에요. 인류의 문명은 바로 그 작은 기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기후 변화나 거대한 재앙으로 이 땅의 모든 씨앗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이 아찔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인류는 아주 대담하고 위대한 약속을 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춥고, 가장 외로운 땅. 북극곰의 발자국이 더 익숙한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의 얼어붙은 산 심장부에 인류의 모든 농업 역사를 담은 ‘현대판 노아의 방주’를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함께 그 위대한 약속의 현장으로 떠나보시죠.

광활한 북극의 설원과 빙하를 배경으로, 산 중턱에 홀로 자리한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광활한 북극의 설원과 빙하를 배경으로, 산 중턱에 홀로 자리한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 세상의 끝으로 향하는 생명의 소포

이야기는 전 세계 1,700여 개의 국립 종자 은행에서 시작됩니다. 페루 안데스 고원의 농부들이 수천 년간 지켜온 형형색색의 감자 씨앗, 대한민국에서 대대로 내려온 구수한 토종 콩, 아프리카의 가뭄을 이겨낸 강인한 수수. 각국의 과학자와 농부들은 가장 소중한 씨앗들을 정성껏 말리고, 특수 제작된 3중 방습 알루미늄 봉투에 담아 상자에 넣습니다.

한 과학자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핀셋을 이용해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씨앗들을 조심스럽게 봉투에 담는 모습
한 과학자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핀셋을 이용해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씨앗들을 조심스럽게 봉투에 담는 모습

이 상자들은 평범한 소포가 아닙니다. 인류의 미래가 담긴 ‘생명의 타임캡슐’이죠. 이윽고 머나먼 여정이 시작됩니다. 비행기에 실려 노르웨이 오슬로를 거쳐, 마침내 북위 78도,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스발바르의 작은 공항에 도착합니다. 이곳의 보안 검색대는 사람보다 이 씨앗 상자들을 더 엄격하게 검사한답니다. 혹시 모를 오염을 막기 위해 엑스레이 스캐너를 통과하는 모습은 마치 국빈을 맞이하는 의전처럼 진지하죠.

## 영원을 향한 관문, 빛의 예술을 만나다

공항을 나선 씨앗들은 눈 덮인 길을 달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릅니다. 회색빛 콘크리트가 쐐기처럼 산을 뚫고 솟아난 모습. 바로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의 유일한 입구입니다. 하지만 차갑고 위압적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입구는 신비로운 빛으로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국제종자저장고의 프리젠테이션 표지
국제종자저장고의 프리젠테이션 표지

노르웨이 예술가 디베케 산네의 ‘영원한 메아리(Perpetual Repercussion)‘라는 작품입니다. 여름의 백야 동안에는 수천 개의 거울 조각들이 북극의 햇살을 반사해 눈부신 보석처럼 빛나고, 겨울의 극야가 찾아오면 200개의 광섬유가 내부에서부터 신비로운 청록색 빛을 발산하며 오로라와 춤을 춥니다. 마치 어두운 산속 깊은 곳에 아주 귀중한 무언가가 잠들어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인류의 희망임을 온몸으로 외치는 듯합니다.

## 고요한 성소, 지구의 심장부로

‘철컹’. 육중한 강철 문이 열리면 세상의 모든 소음이 등 뒤로 사라집니다. 영하의 냉기가 순식간에 온몸을 감싸고, 눈앞에는 영구동토층을 뚫고 130미터 깊이로 뻗어 나간 긴 터널이 펼쳐집니다. 벽면은 온통 하얀 성에로 뒤덮여 있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울리는 자신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관리자는 이곳을 ‘마치 성당에 들어온 것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고요하고, 장엄하고, 거룩한 공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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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종자 저장고의 내부
국제 종자 저장고의 내부

몇 겹의 문을 더 통과하면 마침내 세 개의 거대한 저장실이 나타납니다. 이곳이 바로 인류의 모든 농업 유산이 영원한 잠을 청하는 성소입니다. 온도는 씨앗 보존의 국제 표준인 영하 18°C. 이 냉기를 만드는 것은 인공적인 냉각 시스템이지만, 가장 든든한 보험은 바로 ‘자연’입니다. 만약 전력 공급이 끊겨도, 산 전체를 감싸고 있는 영구동토층이 천연 냉동고 역할을 하며 씨앗을 안전하게 지켜줄 겁니다.

영하 18도의 푸른빛이 감도는 저장실 내부, 선반에 전 세계에서 온 씨앗 상자들이 끝도 없이 쌓여있는 광경
영하 18도의 푸른빛이 감도는 저장실 내부, 선반에 전 세계에서 온 씨앗 상자들이 끝도 없이 쌓여있는 광경

## 이름 없는 영웅들, 그리고 깨어진 약속

이 위대한 프로젝트 뒤에는 이름 없는 영웅들이 있습니다. 노르웨이 정부가 소유하고 건설했지만, 운영은 국제적인 파트너십으로 이루어집니다. 북유럽 유전자원센터(NordGen)가 일상적인 운영을 맡고, 전 세계 종자 다양성 보전을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 ‘크롭 트러스트(Crop Trust)‘가 전 세계 개발도상국들의 씨앗을 이곳까지 운송하고 보관하는 비용을 지원합니다. 국경과 이념을 넘어 오직 인류의 미래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완벽해 보였던 ‘영원의 요새’에도 시련은 찾아왔습니다. 2017년, 예상치 못한 기후 변화의 습격이 시작된 겁니다. 북극의 이상 고온으로 영구동토층의 일부가 녹아내리면서, 녹은 물이 저장고의 입구 터널까지 흘러들어오는 아찔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씨앗이 보관된 저장실까지는 물이 닿지 않았고, 얼어붙은 물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인류에게 큰 경고를 날렸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미래의 희망마저 기후 변화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요. 이후 노르웨이 정부는 대대적인 보강 공사를 통해 터널 전체를 완벽한 방수 구조로 업그레이드하며 ‘영원의 약속’을 다시 한번 다졌습니다.

방수 공사가 진행 중인 저장고 터널 입구의 모습
방수 공사가 진행 중인 저장고 터널 입구의 모습

## 절망의 땅에서 다시 싹튼 희망, 시리아

스발바르 저장고는 먼 미래의 재앙만을 위한 보험일까요? 아닙니다. 이곳의 씨앗은 이미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희망이 되어주었습니다.

끔찍한 내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시리아. 알레포에 있던 중요한 종자 은행 ‘국제건조지역농업연구센터(ICARDA)’ 역시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중동 지역의 가뭄과 척박한 땅을 견디도록 수천 년간 개량해 온 밀, 보리, 렌틸콩 같은 소중한 유전자원을 모두 잃을 위기였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잿더미 위로 돋아나는 푸른 새싹 클로즈업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잿더미 위로 돋아나는 푸른 새싹 클로즈업

하지만 ICARDA의 과학자들은 미리 스발바르에 자신들의 씨앗을 복제해 두었습니다. 그들은 저장고 역사상 최초로 ‘인출’을 요청했습니다. 스발바르에서 돌아온 씨앗들은 레바논과 모로코의 새로운 연구 기지에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잃어버렸던 종자 컬렉션을 거의 완벽하게 복원해냈고, 심지어 새로 증식한 씨앗들을 다시 스발바르에 보내 ‘재입금’까지 한 것입니다. 인류의 협력이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어떻게 희망을 다시 꽃피울 수 있는지 보여준 가장 위대한 증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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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식탁에서 시작되는 위대한 여정

스발바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식탁 위의 음식들. 그 하나하나는 수만 년에 걸친 인류와 자연의 공동 작업이 빚어낸 위대한 유산입니다. 이 다양성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여러 가지 음식을 먹을 권리를 넘어, 미래 인류가 새로운 질병과 예측 불가능한 기후 변화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전적 무기’를 지키는 일입니다.

다양한 색과 모양의 토종 씨앗들
다양한 색과 모양의 토종 씨앗들

스발바르의 얼음 요새에 잠든 120만 종의 씨앗들. 그 작은 생명의 약속들이 영원히 잠들어 있기만을 바라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희망 아닐까요? 당신의 식탁에서, 우리 땅의 토종 농산물에 대한 작은 관심에서부터 그 위대한 여정은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스발바르#국제종자저장고#씨앗은행#최후의날저장고#인류유산#생물다양성#기후변화#CropTrust#노르웨이#과학#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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