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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죽음 보고서: 노량해전의 마지막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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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희생, 그리고 역사에 남은 의문들

임진왜란의 대장정을 마무리 지은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승리의 기쁨과 함께 조선 사회에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오늘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 상황부터 사망 경과, 그리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역사적 논쟁점과 후대 사회에 미친 영향까지, 심층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1. 노량해전 당시 전투 상황 요약

임진왜란 마지막 해인 1598년 음력 11월 18일 밤부터 19일 새벽까지, 경상도 남해 노량 해협에서는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의 연합함대가 일본군 함대를 상대로 치열한 해전을 벌였습니다.

이 노량해전에는 조·명 연합 함선 약 500척과 왜군 함선 약 500척이 참전하여, 임진왜란 중 최대 규모의 해전이 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철수를 시도하자, 조선 수군 통제사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은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연합 함대를 이끌고 노량 해역으로 출격한 것입니다. 밤새 이어진 교전에서 연합 함대는 밀집한 왜군 함대를 맹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노량해전의 승리로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은 사실상 종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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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전에서 일본 측은 함선 수백 척이 침몰 또는 나포되고 퇴각에 실패한 반면, 조선·명 연합군도 일부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하여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이 전사하고 조선군 100~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명군에서도 등자룡(鄧子龍) 부총병 등 장수가 전사하고 500여 명의 피해를 입었으나, 끝내 일본군의 퇴각을 저지하고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이자, 이순신 장군이 승리와 함께 장렬히 최후를 맞은 해전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2. 이순신 장군의 사망 원인과 경과 설명

노량해전이 한창이던 1598년 11월 19일 새벽, 이순신 장군은 연합 함대의 선봉에서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직접 북을 울리며 병사들을 독려하고 활로 적을 쏘며 싸우다가, 갑작스레 날아든 왜군의 조총 탄환에 왼쪽 가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이 치명적인 총상으로 인해 이순신은 선상에서 쓰러진 직후 의식을 잃었고, 곧 전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일설에는 당시 이순신이 갑옷을 착용하지 않아 탄환이 가슴을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탄환이 두터운 갑옷을 뚫고 등을 완전히 관통했다고도 되어 있어, 실제 갑옷 착용 여부에 대해서는 사료 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순신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자 그의 곁에 있던 장졸들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특히 배 위에 함께 승선해 있던 그의 아들(이회)과 조카(이분)가 울음을 터뜨리려 했고, 주위 군사들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이때 통역관으로 배에 타고 있던 이문욱(손문욱)이라는 군관이 재빠르게 이순신의 몸을 옷으로 덮어 시신을 가리고, 곁의 아들과 조카 등의 울음을 멈추게 한 뒤 직접 북을 치며 지휘를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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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치로 배 위의 병사들은 통제사가 쓰러진 줄을 알지 못한 채 평소와 다름없이 사기를 유지할 수 있었고, 연합군은 전세를 끝까지 유지하여 승전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 전투가 끝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이순신의 죽음은 철저히 은폐되었고, “순신이 죽지 않은 줄 알고” 병사들은 더욱 용맹히 싸웠다고 합니다. 결국 이순신이 최후를 맞은 뒤에도 “죽은 이순신이 살아있는 왜적을 물리친”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전투가 완전히 끝난 후에야 비로소 연합군 장졸들에게 통제사의 전사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에 호남 지방 전체의 백성들이 통곡하였고, 노모와 어린아이까지 슬피 울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국민적 슬픔에 잠겼다고 전합니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승전의 기쁨과 함께 찾아온 크나큰 비통함으로 조선 사회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순신의 유언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공식기록에는 이순신 본인이 한 최후 진술이 직접 인용되지는 않으나, 그의 죽음을 숨기고 끝까지 싸운 부하들의 행동을 보면 이순신이 끝까지 군심 동요를 경계하며 싸움을 완수하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휘관의 희생정신과 임전무퇴의 태도가 노량해전 승리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전사의 원인이자 동시에 전승의 결정적 요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3. 이순신 죽음을 둘러싼 의문점과 논쟁점 분석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극적이지만, 역사적으로 몇 가지 의문점과 논쟁을 낳아 왔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학계와 민간에서 다양한 설(說)이 제기되어 왔는데, 이는 주로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사소한 기록 차이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추측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래에서는 이순신 최후를 둘러싼 주요 설들과 그 근거, 그리고 역사학자들의 해석을 정리합니다.

3.1 공식 기록과 정설: 전사설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내용은, 앞서 기술한 대로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적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당시 전투에 참전한 다수의 조선과 명 장병들의 증언 및 공식 사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의 최고 공식기록인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11월 27일자 기록에는 이순신의 전사 상황이 비교적 상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이순신이 몸소 활을 쏘며 불의에 진격하여 한창 혈전을 벌이던 중,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배 위에 쓰러졌다"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즉 ‘중흉적환(中胸適丸)’, 말 그대로 적의 탄환이 가슴에 명중하여 전사하였다는 것이 공식적인 기록입니다.

또한 실록과 여러 기록이 이순신의 사망 직후 부하들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계속 독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일치된 내용을 전하고 있어, 전투 중 전사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 같은 전사설은 이순신 본인이나 주변의 음모 없이, 그야말로 “눈 먼 총탄"에 의해 우연히 전사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보여준 전술 우세와 이순신의 용맹을 고려하면 적의 공격에 쉽게 노출되었을 가능성은 낮지만, 전쟁 상황의 불가측성 속에서 결국 적의 총탄이 명중하는 불운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현대 다수의 역사학자와 군사전문가들은 특별한 반증이 없는 한 이 공식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장렬한 전사”**로서 이순신의 죽음을 평가합니다. 다만 이순신의 최후가 너무 극적이었기에, 후대에 다양한 추측성 설화들이 파생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추측들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뉩니다: 자살설, 타살설(아군 탄환설), 그리고 생존 은둔설입니다.

3.2 자살설: 갑옷 미착용과 정쟁 속 순절 가설

이순신 자살설은, 이순신 장군이 일부러 죽음을 선택했다는 파격적인 주장입니다. 조선 숙종 연간(17세기 말) 이미 학자 이민서 등이 이러한 설을 제기했다고 전하며, 이후 간헐적으로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설의 근거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이순신이 최후의 전투에서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전언입니다. 실제로 후대의 일부 평론가들은 “만약 그가 갑옷을 입었다면 가슴을 관통당하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을 것"이라 지적하며, 이순신이 의도적으로 갑옷을 벗어둔 채 출전하여 죽음을 자초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순신이 당시 처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고 설명합니다. 임진왜란 막바지에 이순신은 연전연승으로 백성들의 절대적인 신망을 얻고 있었지만, 동시에 조정 내에서는 그에 대한 경계와 견제도 존재했습니다. 이순신은 이전에 원균 등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파직·옥살이를 당하고 백의종군한 전력이 있었고, 극적으로 복귀하여 명량대첩의 대승을 거두자 조정 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또다시 휘말릴 조짐이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도원수 권율과의 전략적 갈등으로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노량해전 역시 권율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이순신의 주도로 전개된 터라 전공 후 정치적 시비가 일 것을 이순신이 예감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전란이 끝나갈 무렵 거대한 해군 세력을 거느린 이순신의 존재는 임금인 선조에게도 잠재적 부담이었는데, 이순신 스스로도 이러한 군주와 조정의 두려움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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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살설에 따르면 이순신은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토사구팽’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비극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깨끗이 죽음을 택했다는 논리입니다. 갑옷을 입지 않고 적탄에 쓰러진 것은 바로 스스로 순직을 선택한 행동이라는 해석이지요.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종종 의병장 김덕령의 옥사 사건이 언급됩니다. 김덕령은 왜란 중 큰 공을 세운 의병장이었으나, 전쟁 막바지에 모함을 받아 역모 혐의로 체포·고문당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살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순신 역시 김덕령과 다르지 않은 신세가 될 것을 우려하여, 영예를 지킨 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정쟁으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음으로써 삶을 마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적인 해석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습니다. 우선 당대의 유교적 가치관에서 볼 때, 나라를 구한 명장이 개인의 두려움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은 용납되기 어려운 일입니다. 역사학자 장학근 교수는 “비록 유성룡의 실각과 자신에 대한 악소문 등 어려움이 있었을지라도, 충의의 화신인 이순신이 자기 손으로 삶을 끊는 선택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자살설의 근거인 ‘갑옷 미착용’ 여부도 불확실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오히려 적탄이 갑옷을 뚫고 관통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순신이 평소처럼 갑옷을 입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자살설을 뒷받침하는 핵심 근거와 모순되는 대목입니다. 결국 자살설은 흥미로운 가설일 뿐, 결정적 증거가 없고 사후적 해석에 의존하기에 주류 학계에서는 큰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이순신의 죽음에 당시의 추한 당쟁(黨爭)이 한 몫 했다는 점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이순신을 죽인 것은 왜군의 총탄만이 아니라 조정의 당쟁이었다”**는 평가는 자살설의 진위와 별개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3.3 타살설: 아군 저격설 및 친우탄(親友彈) 의혹

자살설과는 반대로, 타살설은 이순신이 적이 아닌 아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주장을 포함합니다. 이를 두고 암살설 또는 아군 오인사격설 등 여러 형태의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중심 내용은 이순신이 조선 측 내부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는 가설입니다. 현대에 와서도 장한식 저서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2009) 등이 이러한 아군 저격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이 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의도적인 암살 음모론이고, 다른 하나는 우발적 오인사격 가설입니다. 두 경우 모두 이순신이 적탄이 아니라 味方의 탄환에 희생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몇 가지 사료상의 단서들이 거론됩니다.

암살 음모론 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정의 일부 세력 또는 선조 임금 자체가 이순신을 제거하려 하였고, 사전에 심복을 침투시켜 전투 중에 그를 저격했다는 것입니다. 이 배후설의 동기는 앞서 자살설에서 언급된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 후 이순신의 막강한 영향력을 두려워한 선조의 질시와 견제로 설명됩니다. 실제로 이순신이 명나라로부터 해군 도독에 임명되어 전후에 조정이 함부로 처벌하기 어려운 위치에 오르자, 선조로서는 고려 말기 이성계 사례까지 떠올리며 경계했을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결국 선조가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비밀 명령이 내려졌을 가능성을 이 설은 제기합니다.

이러한 암살설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로 몇 가지 사료의 미묘한 표현 차이가 지적됩니다. 첫째,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충무공 행록」 기록입니다. 이분은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과 함께 배에 있었는데, 그가 남긴 글에는 “무술년 11월 19일 새벽, 공이 한창 싸움을 독려하고 있는데 문득 날아든 탄환에 맞았다(忽中飛丸)“고만 적혀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분이 ‘적탄(敵彈)’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中胸賊丸)“고 분명히 적은 것과 달리, 현장 목격자인 이분의 기록은 그냥 날아든 탄환으로 뭉뚱그려 표현하고 있습니다. 암살설을 지지하는 측은 “왜 이분은 탄환의 출처를 명시하지 않았을까?“에 주목하며, 그 이유는 탄환이 일본군 것으로 단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그 탄환은 일본군이 쏜 것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애매하게 기술했다는 것이지요.

둘째, 류성룡의 《징비록》 기록입니다. 서애 류성룡은 이순신의 절친한 동료이자 전란 기간 조정의 핵심인물로서,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언급합니다. 류성룡은 **“이순신을 맞힌 탄환은 두터운 갑옷을 뚫고 가슴에서 등을 완전히 관통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조총 위력이 그다지 높지 않아 멀리서 쏜 탄환으로 갑옷을 뚫기는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류성룡의 이 묘사는 탄환이 매우 가까운 거리, 이를테면 이순신의 배 안이나 아주 근거리에서 발사되었음을 암시한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왜 굳이 류성룡이 “갑옷을 뚫고 완전 관통했다"는 자세한 표현을 남겼는가에 대해, 혹시 그도 이순신의 죽음에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고 느낀 것은 아니냐는 추측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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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선조의 태도입니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선조 임금의 반응이 너무 담담했다는 점도 음모론자들의 눈길을 끕니다. 승정원일기 및 실록에 따르면, 11월 23일 군문 도감이 전황을 보고하며 이순신의 전사를 아뢰자, 선조는 단지 **“알았다”**라고 짧게 대답했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을 구한 최고 공신이 전사했는데도 임금은 눈물은커녕 아무 감정 없는 한마디로 답했으니 싸늘한 반응이었다는 것이지요. 이를 두고 “임금은 이미 다른 비밀 경로로 이순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됩니다. 실제로 선조는 이순신 사망 엿새 후(11월 25일 경)에서야 비로소 애도를 표하며 각종 후대 조치를 명했는데, 어떤 이들은 “살아있는 이순신은 두려웠지만, 죽은 이순신은 고마웠을 뿐"이라며 선조의 복잡한 심경을 평하기도 합니다.

넷째, 손문욱(孫文彧)이라는 인물에 대한 의혹입니다. 손문욱은 조선 수군의 하급 무관으로,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한 경력이 있는 인물입니다. 원래 수군 대장선(통제사 기함)의 정규 승무원은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노량해전 당일 이순신의 배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앞서 공식 기록에 등장하는 이문욱(李文彧)과 같은 인물로 보이는데, 그는 이순신이 총탄에 맞자 재빨리 현장에 나타나 이순신의 죽음을 확인한 뒤 아들과 조카 등의 울음을 달래고 시신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곧장 북을 치며 지휘를 이어간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이 공으로 전쟁 후 손문욱은 가장 큰 전공을 세운 인물로 떠올라 승진 가도를 달렸는데, 당대 수군 장졸들 중 일부는 그가 과장된 전공을 내세운다 분노했으나 막을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음모론자들은 바로 이 손문욱을 이순신 암살의 실행자 혹은 공모자로 의심합니다. 그 근거는 손문욱의 행적이 이상할 만큼 시의적절했다는 점입니다. 새벽 어스름에 총탄이 빗발치던 전장의 한복판에서, 평소 지휘탑에 접근하기 어려운 비슷한 계급의 무관이었던 손문욱이 어떻게 가장 먼저 통제사의 부상 상황을 알아채고 조치를 취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미리 알고 준비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빠른 대응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지요. 결국 손문욱이 전투 전에 대장선에 오른 경위부터 전투 직후 일사분란한 행동, 전후 파격적인 승진까지 모두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는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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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암살과 같은 명백한 음모가 아니라 **“전쟁터의 혼선 속에 빚어진 아군측 오인사격”**일 수 있다는 보다 완화된 주장도 있습니다. 이는 누군가 의도를 갖고 쏜 것이 아니라, 새벽 어둠 속 아군이나 명군의 오발(誤發) 혹은 아군 진영 내 소동 중 유탄이 빗맞아 이순신에게 명중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실제 해전에서는 아군과 적군 함선이 뒤섞여 근거리 교전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순신이 탄 배 근처에서 잘못 쏜 총탄이 맞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추측일 뿐이며 구체적 증거는 없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이분 등은 탄환의 출처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아군 탄환이라고 단정할 단서는 없습니다. 또한 조선군 내부에 조총을 다룰 병사가 거의 없었고, 명군의 화기 오발 가능성 정도가 거론되나 이를 뒷받침할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타살설 전반에 대한 사학계의 평가는 매우 신중합니다. 이 설들은 주로 빈틈을 파고든 가설적 추리에 기반하고 있으며, 결정적인 물증이 없는 음모론 범주로 간주됩니다. 장한식 등의 연구가 이러한 가능성을 흥미롭게 제기한 바 있지만, 학계 다수는 “합리적 의심” 수준에 머문 이야기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이순신 죽음과 관련한 크고 작은 미스터리들은 대중의 흥미를 끌어왔고, 역사 관련 방송이나 서적에서 여러 번 소개되어 온 만큼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요약하면, 암살/타살설은 선조와 조정의 정치적 의도와 전장 상황의 모호함을 연결지은 추론으로서 존재하나, 어디까지나 공식 기록을 보완 없이 뒤집을 증거는 없다는 것이 현재 역사 연구의 일반적인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설을 통해 당시 조정이 충무공을 시기·견제한 정황, 그리고 이순신 사후 일부 인물들의 석연치 않은 행보 등에 관한 토론이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건 해석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3.4 은둔설: 죽음 조작 및 생존설

마지막으로 은둔설은, 이순신 장군이 실제로는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후 은거 생활을 했다는 주장입니다. 쉽게 말해 이순신의 사망 조작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앞서 자살설의 변형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자살설이 의도적 순절을 강조한다면, 은둔설은 극적인 탈출을 상상한 것입니다. 이 설에 따르면, 이순신과 그의 가까운 가족들이 짜고 그의 죽음을 연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전투에서는 다른 이가 대신 죽었거나 혹은 시신을 숨기고 이순신 본인은 몰래 배를 빠져나와 살아남았다는 식의 전개를 상정하지요.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이순신은 이름을 숨긴 채 어딘가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은둔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몇 가지 특이한 정황에 주목합니다. 첫째,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의 가족들이 현장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순신의 맏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및 그 형 이분)이 그날 처음으로 해전에 참가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이 이순신이 총탄에 맞는 장면을 본 유일한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서술했듯 이들은 해전이 끝날 때까지 수 시간 동안 통제사의 죽음을 숨기는 데 가담했지요. 은둔설은 이를 두고 “자신들의 아버지·삼촌의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 이들보다 더 좋은 조력자는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이순신의 아들과 조카가 일부러 전투에 참가하여 사망 위장극을 연출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묘 이장(移葬) 문제입니다. 공식적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시신은 노량해전 직후 전남 고금도로 운구되었다가, 곧 고향인 충청도 아산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장례는 다음 해(1599년) 2월 11일에 국장(國葬)에 준하여 거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로부터 16년 후인 1614년에 이순신의 묘를 약 600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장한 기록이 있습니다. 은둔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국장으로 모신 영웅의 묘를 멀쩡히 있다가 10여 년 후에 이장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는 “1614년이 바로 충무공이 실제로 세상을 떠난 시점"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1598년에는 죽음을 가장하고 숨어 살다가, 1614년 경 70세 전후의 나이로 진짜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그제서야 묘소를 제대로 꾸리고 다시 장사지낸 것이라는 가설입니다. 이때는 선조도 이미 죽고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기라, 이순신이 살아있었다면 충분히 숨어지낼 법한 혼란기라는 설명도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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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은둔설은 상상력이 매우 가미된 시나리오로 받아들여집니다. 당대 최고 명장이 목숨을 부지하고자 의도적으로 탈출을 도모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고, 무엇보다 이순신 본인의 충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큽니다. 실제 해전 당시 이순신은 “적 한 명도 살려 보내지 말라"며 마지막까지 전의를 불태웠던 인물인데, 그런 그가 정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쳤을 리 없다는 지적입니다. 또한 은둔설을 뒷받침할 직접적인 사료도 전무합니다. 이설에 등장하는 여러 정황 — 가족의 참전, 묘 이장 등 —은 다른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사안들입니다. (예컨대 이장 당시 광해군 대의 혼란이나 풍수지리상의 문제 등으로 묘를 옮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학계에서 은둔설은 거의 인정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설을 제기하는 자체가 충무공에 대한 모독"이라는 비판적 견해도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은 갑옷 미착용설(자살설), 아군탄환설(암살/오인), 은둔생존설로 대표됩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각기 일부 사료의 행간이나 맥락을 재해석하여 나온 것으로, 사료 간의 작은 불일치와 당대 정치 상황이 맞물려 생성된 대체 역사 가설들입니다. 비록 주류 역사서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 설들을 통해 우리는 이순신의 죽음이 당시에도 그리고 후대에도 하나의 미스터리와 논쟁거리로서 관심을 끌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날까지 남은 기록들을 종합해볼 때, 충무공의 죽음은 전장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그의 비범한 삶과 죽음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여러 각도에서 재해석되고 이야기화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4. 관련 사료 기록의 내용과 해석

이순신 장군의 최후와 관련하여 남아있는 기록물과 사료는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도 주요한 1차 사료로는 이순신 본인이 남긴 《난중일기》, 조정의 공식 일지인 《승정원일기》, 편년체 국정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등이 있습니다. 또한 그의 유족이나 동료들이 남긴 문헌으로 이분의 「행장」, 류성룡의 《징비록》, 기타 후대 편찬 사서인 《난중잡록》, 《연려실기술》 등도 참고됩니다. 각 사료마다 이순신의 죽음을 전하는 디테일과 어조에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이를 비교함으로써 앞서 소개한 여러 설들의 근거와 맥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난중일기》

충무공 이순신이 전쟁 기간 직접 기록한 일기입니다.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진중 생활이 날마다 담겨 있으며, 국보로도 지정된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전사 당일(1598년 음력 11월 18-19일)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난중일기》는 11월 17일까지만 적혀 있고, 이튿날 노량해전이 벌어졌으므로 이순신 본인의 일기로는 그의 죽음을 직접 전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이순신이 특별한 예감을 남겼다기보다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설에 11월 18일자 일기에 단지 “맑음"이라고 적혀 있다는 언급이 있을 정도로 담담합니다.) 따라서 난중일기에서는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직접 정보는 얻을 수 없지만, 오히려 그의 심경과 건강 상태, 전투 준비 상황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일기 곳곳에 그는 잦은 부상과 병환에 시달렸다는 내용, 가족과 부하들에 대한 걱정, 그리고 매일매일 죽기를 각오하며 싸웠다는 결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 기록들은 이순신이 이미 지칠대로 지쳤음에도 정신력으로 버텨나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후대에 제기된 자살설이나 은둔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간적 고뇌를 읽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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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조선 왕실의 비서기관 격인 승정원의 일일 기록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조정 동향과 국왕의 언행이 담겨 있습니다. 노량해전 승전 및 이순신 전사 소식은 1598년 11월 23일자 승정원일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날 군문 도감이 전황을 보고하며 “노량에서 적을 대파하였으나, 이순신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아뢰었고, 이에 선조는 담담하게 **“알았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짧은 기록은 앞서 언급했듯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선조의 냉담함에 대한 해석을 낳기도 했습니다. 이후 며칠 간 승정원일기에는 조정에서 논의된 이순신에 대한 추후 예우 등이 나타납니다. 예컨대 12월 4일자 기록으로, 선조가 “이순신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부의를 내리며, 장례를 관에서 도와 치르게 하라. 그의 아들들은 몇인가? 탈상 후 모두 등용토록 하라. 바닷가에 사당을 세워주는 것도 좋겠다.“고 지시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곧 이어 실록에도 반영되는데, 승정원일기를 통해 당시 조정이 어떻게 이순신의 죽음을 다루었는지 생생히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승정원일기는 전황 보고와 국왕·신하들의 즉각적 반응을 담고 있어, 이순신 전사의 공식 통보 과정과 초기 조치를 이해하게 해줍니다.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임진왜란 시기의 국왕 선조 치세를 정리한 실록은 이순신의 활약상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노량해전과 이순신 전사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권111 (선조 31년 11월 27일자)에는 노량해전의 경과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창 혈전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당시 통사)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린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가 순신이 죽지 않은 줄 알고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이러한 실록의 기술은 앞서 서술한 공식 정설과 정확히 부합하며, 당대 조선 조정이 이순신의 최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특히 이문욱(손문욱) 통사의 역할, 병사들의 행동, 백성들의 통곡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이순신의 죽음이 국가적 사건으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선조실록 및 이어 편찬된 선조수정실록 등에는 이순신에 대한 추도와 포상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 선조 32년 2월 8일자 기록에는 “노량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싸워 이룬 것인데, 불행히 탄환을 맞았다. 이에 군관 송희립 등 30여인이 상인의 입을 막아 곡성을 내지 못하게 하고 생시와 다름없이 영각(令角)[나팔소리]을 불어 모든 배가 주장(主將)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하므로써 승세를 이루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이순신 사후 부하들의 행동을 또다른 각도에서 설명한 것으로, 송희립 등 여러 장교들이 죽음을 숨겼다고 적혀 있습니다. (앞서 통사가 북을 쳤다는 기록과 맥락을 같이하며, 여러 사람이 함께 은폐 작전에 나섰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실록의 기록들을 통해 볼 때,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전사를 국가의 커다란 희생으로 여겨 공식 문서에 남겼고, 동시에 그의 지휘 덕분에 거둔 승리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분의 「충무공 행록」

이순신의 친척인 이분(李芬)이 쓴 이순신의 행장(行狀, 전기)은 가족의 입장에서 남긴 기록으로서, 이순신의 최후에 대해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은 묘한 표현상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즉 **“문득 날아든 탄환에 맞았다”**고만 적고 ‘적의 탄환’이라는 표현을 회피한 점입니다. 행장은 고인의 공적을 기리는 문서라서 보통 미화되기 마련인데, 정작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서술한 부분이 오히려 후대의 여러 추측을 낳았습니다. 일부 연구자는 이분의 행장이 너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느껴지는 서술이라며, “정말 현장에서 본 사람이 이렇게 쓸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는 은둔설 지지자들이 특히 강조하는데, 이분이 혹시 실제 정황과 다르게 일부러 극적으로 묘사하여 사실을 덮은 것 아니냐는 식의 의심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며, 행장의 해당 부분을 그저 통상적인 문학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행장은 이순신의 사후 약간의 시일을 두고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실록과 다른 세부 표현을 썼다고 해서 곧바로 음모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류성룡의 《징비록》

서애 류성룡이 전란 이후 쓴 회고록인 징비록은, 이순신과 당대 사건들에 대한 귀중한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탄환의 위력에 대한 기술이 눈에 띄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두터운 갑옷을 뚫고 가슴에서 등을 완전히 관통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류성룡은 이순신의 용맹을 칭송하며, 그가 전사하지 않았다면 전후에도 나라에 더 큰 공을 세웠을 것이라는 애석함을 곳곳에서 나타냈습니다. 실제로 류성룡은 여러 차례 기록에서 “조선에는 이순신이 있었다"고 강조하며, 그가 나라를 구한 결정적인 인물이었음을 증언했습니다. 징비록은 이순신의 전사 장면 외에도, 이전에 그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고도 내색하지 않고 버텨낸 일화 등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와 투혼을 기록하고 있어 후대의 평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류성룡의 이러한 기록들은 훗날 이순신이 신격화된 민족 영웅으로 기억되는 데 기여했고, 동시에 이순신 죽음의 배경에 대한 미묘한 떡밥(예: 근거리 탄환 묘사)을 남겨 훗날 다양한 해석의 단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외 사료

이순신 사후에 편찬된 여러 역사서와 야사들도 관련 내용을 전합니다. **《난중잡록》**은 난중일기 등에 없는 몇 가지 일화들을 보충해 전하는데, 노량해전 시 이순신의 최후에 부하들이 임기응변으로 지휘를 이어갔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연려실기술》 같은 조선 후기 야사 모음집에도 이순신에 얽힌 일화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숙종 시대 이민서의 자살설 언급이나, 선조의 견제 심리 등의 이야기가 후대에 구전·기록되어 전해졌습니다. 이런 후대 사료들은 당대의 공식기록에 없는 세부 해설이나 민간 전승을 담고 있어 흥미롭지만, 역사적 사실 여부는 엄밀히 따져봐야 합니다. 예컨대 연려실기술 등에는 “이순신이 죽음을 예감하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자신의 묘 자리를 가리켰다"거나 “선조가 꿈에 이순신을 만나 후회했다"는 등의 야담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민간의 전설로 간주됩니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사료들을 종합하면 핵심 사실관계는 대체로 일치합니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그의 죽음은 전투 후까지 숨겨졌으며, 전사 소식에 조정과 백성이 크게 슬퍼했다. 다만 각 기록이 강조하는 부분이나 누락한 부분의 차이에서 자잘한 논쟁점들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사료 작성자의 입장과 시기에 따른 것이므로, 오늘날 역사 연구자는 이들을 교차검증하여 최대한 사실에 부합하는 서사를 재구성합니다. 궁극적으로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와 전쟁의 실상을 전해주고, 승정원일기와 실록은 국가 차원의 공식 기록으로 사건의 얼개를 잡아주며, 행장과 징비록 등은 주변인의 시선과 추가 정보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들 사료의 종합적인 해석을 통해 우리는 이순신 죽음의 진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사망 이후 조선 사회 및 역사적 평가에 미친 영향

충무공 이순신의 죽음은 비록 전쟁의 승리와 때를 같이했지만, 조선 사회에 매우 깊은 충격과 슬픔을 남겼습니다. 노량해전 승전 소식과 동시에 날아든 이순신 전사의 부음에 백성들은 크게 통곡했고, 호남 지방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노소를 막론하고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고 전합니다. 이는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실록에도 “호남 일도의 백성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어린아이까지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민중에게 이순신은 이미 생전에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으므로, 그의 전사는 곧 나라를 구한 영웅의 순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집단적인 애도는 조선 조정에도 전달되었고, 국왕과 신하들은 적잖이 당황하며 뒤늦게나마 그의 공을 기리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선조 임금은 이순신의 사망 소식을 접한 직후에는 담담한 반응을 보였으나, 곧바로 장례와 예후에 관해 파격적인 명령을 내렸습니다. 전쟁 통에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던 수군을 위해 국가에서 부의(賻儀)를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고, 이순신에게는 당시 최고위직인 **의정부 우의정을 증직(追贈)**하여 그의 공로를 표창했습니다. 또 “바닷가에 사당을 세우라"는 선조의 지시는, 이순신을 신령으로 모셔 향후 바다의 수호신처럼 기리겠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는 당대 무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극진한 예우로, 비록 생전에는 시기와 모함을 받았던 이순신이지만 죽음 후에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그를 최고 공신으로 대우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선조는 이순신의 남은 가족들을 모두 관직에 임명하도록 지시했고, 정부 차원에서 그의 장례를 국장에 준해 치르도록 하였습니다. 이순신의 유해는 전남 고금도에서 임시 안치되었다가, 12월 초에 고향인 아산 현충사 인근으로 운구되어 안장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나라가 구원자 영웅을 기리는 의식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이순신의 죽음이 미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전쟁 영웅의 부재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그가 남긴 승리의 유산이었습니다. 다행히 노량해전이 임진왜란의 실질적 종전을 가져왔기에, 이순신의 전사로 인한 군사적 공백이 추가 패배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전쟁이 더 지속되었다면, 그의 상실은 조선 수군 나아가 국가안위에 치명적이었을 것입니다. 이 점을 조정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선조는 전란 후 이순신과 같은 인재를 다시는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일화에 따르면 선조는 나중에 “이순신 하나만 있어도 내 어찌 근심하였으랴"라고 탄식하며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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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회에서 이순신의 평판은 그의 사망 이후 세월이 갈수록 더욱 높아져 갔습니다. 광해군, 인조 대를 거치는 동안 나라가 또다시 환란(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자, 사람들은 다시금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을 떠올리게 됩니다. 인조 21년(1643년)에는 마침내 인조 임금이 이순신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습니다. ‘충무’란 무인에게 내리는 최고 등급의 시호로서, 충성스럽고 용맹한 무공을 기린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이순신은 공식적으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의 위상은 더욱 격상되었습니다. 이 시호가 내려진 배경에는 1636년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겪은 직후라는 시대상이 있었는데, 아마도 전대 미증유의 치욕을 겪은 왕과 조정이 과거 나라를 구한 충신을 재평가하고 격상함으로써 민심을 다독이고 자신들을 반성하려 한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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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선 정부와 왕실은 계속해서 충무공을 기리는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효종 10년(1659년)에는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 “충무공 이순신 전몰지역“임을 알리는 기념비(충무공 이순신의 비)를 세웠습니다. 또한 충무공의 위패를 모신 사당들도 건립되었는데, 1706년(숙종 32년)에는 아산에 **현충사(顯忠祠)**를 세워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현충사는 1606년 이순신의 아들 이분 등이 세운 사당을 숙종 때 국가에서 새로 중수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당에서 역대 임금들은 충무공에게 제사를 지내며 그 충의를 기렸고, 특별히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그의 위패에 고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예컨대 영조, 정조 시대에도 충무공 제향을 국가 행사로 중시하여, 그의 충절을 본받을 것을 신하들에게 권유하였습니다.

18세기 후반 정조 임금 때는 **《이충무공전서》**라는 책이 간행되었습니다. 1795년(정조 19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는 이순신의 난중일기, 공문서, 전공 보고서, 시문 등 관련 자료를 총망라한 전집으로서, 정조가 친히 교정하고 서문을 지어 출간한 것입니다. 정조는 이순신을 비롯한 임진왜란 공신들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충무공의 사적을 후대에 알리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난중일기의 원문과 함께 정조의 찬양 글이 실려 있는데, 정조는 “이순신의 충의와 위업이 백대에 길이 빛나리라"는 뜻을 밝히며 그의 역사를 올바르게 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러한 편찬 사업은, 이순신의 삶과 죽음이 이미 조선 역사에서 위대한 교훈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합니다. 곧 충무공의 숭고한 희생과 무훈은 후대의 거울이 되어,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소환되는 정신적 유산이 되었습니다.

종합하면,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조선 사회에 두 가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나는 즉각적인 군민 사기의 상실과 애도였습니다. 전쟁 내내 무패신화를 이어온 영웅의 전사는 백성들에게 실로 큰 슬픔이었고, 이로 인해 영웅 숭배 현상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평가와 기억의 체계화입니다. 그의 죽음 직후에는 조정이 서둘러 그를 예우하고 공훈을 기렸으며, 이후로는 시호를 추서하고 사당을 세우며 국가 차원에서 영웅으로 추앙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충무공 이순신은 성웅(聖雄)으로 칭송되며, 군사적 지도력과 애국심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국난의 시기마다 민족은 이순신의 이름에서 용기와 단결을 얻고자 했고, 독립운동가나 지도자들이 그의 예를 들어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에도 서울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동상, 각종 해군 함정에 명명된 “충무공 이순신함” 등은 그의 유산이 현재까지 살아있음을 보여줍니다.

역사적 평가 측면에서, 이순신의 죽음은 **“위대한 승리와 함께 찾아온 비극”**으로서 더더욱 극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많은 역사서와 대중문화 작품들은 노량해전의 마지막 순간을 조명하며, 자신의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한 성웅의 최후로 묘사합니다. 학자들은 만약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면 오히려 당쟁에 휘말려 불운했을지도 모른다고 평하기도 합니다. 차라리 절정의 승리 순간 장렬히 순국했기 때문에 영원한 영웅으로 남을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한 평가입니다. 분명한 것은,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와 죽음은 조선 역사, 나아가 한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요소 중 하나였으며, 그의 희생은 임진왜란의 종결과 조선 왕조의 존속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충무공 이순신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들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희생과 충성, 논공행상과 시기의 문제, 기록의 해석과 영웅 만들기 등 다양한 주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노량해전의 포연 속으로 사라진 그의 최후는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여러 교훈을 줍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마지막 가르침과 함께 그는 역사 속에 영원히 살아있으며, 그에 대한 논쟁과 연구 또한 앞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영원한 귀감과 신비로서, 후대의 기억 속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이 보고서 작성에는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류성룡의 《징비록》 등 1차 사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KBS WORLD 등에서 제공한 해설자료를 참고하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죽음과 관련된 사실과 논점을 최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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