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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부터 삼성전자까지,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모험

pho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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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내려놓은 등반가

젊은 시절 암벽을 등반하는 이본 쉬나드의 흑백 사진
젊은 시절 암벽을 등반하는 이본 쉬나드의 흑백 사진

이야기는 2022년 9월, 한 늙은 등반가의 편지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약 4조 원의 가치로 키워낸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Patagonia). 창업자 이본 쉬나드는 이 회사를 팔거나 주식 시장에 상장하는 대신, 자신과 가족이 가진 지분 100%를 통째로 지구에게 넘겨버렸습니다. 그의 선언은 조용하지만 세상의 모든 회의실을 뒤흔들 만큼 강력했죠.

“이제부터, 지구는 우리의 유일한 주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돈을 많이 기부했다는 훈훈한 미담이 아니었어요. 한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이라 불리는 공식 자체를 뒤집어엎는, 거대한 혁명의 신호탄이었습니다.

평생을 사랑했던 자연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게 만든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답은 오늘날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오해받는 단어, ESG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ESG와 그 심장인 ‘탄소중립’이 더 이상 지루한 보고서 속 단어가 아니라, 우리 시대 기업들의 생존과 번영을 건 가장 극적인 모험담이라는 것을 보여줄 겁니다. 쉬나드의 결단은 그 거대한 서사의 첫 장면일 뿐입니다.

1장: 1경 원짜리 편지가 보낸 최후통첩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황소 동상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황소 동상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한때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좋은 말이긴 하지만, 돈 버는 일과는 거리가 먼, 소수의 착한 투자자들이나 관심을 갖는 구호에 가까웠습니다. 이 변방의 개념을 세상의 중심으로 끌어온 사건은 2020년 1월, 한 통의 편지로부터 시작되었죠.

세계에서 가장 큰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의 CEO 래리 핑크. 무려 1경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굴리는 이 거인이 전 세계 CEO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기후 변화는 곧 투자의 리스크입니다.” 앞으로는 환경과 사회에 기여하는 기업에만 투자하겠다는,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습니다.

왜 그의 편지는 이토록 강력했을까요? 시대의 거대한 파도 세 개가 바로 그 지점에서 만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첫째, 규제의 파도: 보이지 않는 세금, 탄소국경세

유럽연합(EU)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라는 이름의 거대한 장벽을 세우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탄소 배출을 줄이려 노력하지 않는 나라에서 만든 물건에는 ‘탄소세’를 물리겠다는 뜻이죠. 2026년부터 이것이 본격화되면, 탄소 감축은 윤리가 아닌 수출 기업의 가격표를 결정하는 생존의 문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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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소비의 혁명: 지갑으로 신념을 말하는 사람들

요즘 소비자들은 단순히 물건만 사지 않습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소비로 표현하는 **‘미닝아웃(Meaning Out)’**이 새로운 기준이 되었죠. 환경을 파괴하고,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는 기업의 물건 대신, 조금 더 비싸더라도 지구를 생각하는 착한 기업의 제품을 기꺼이 삽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소비로 표현하는 Meaning Out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소비로 표현하는 Meaning Out

🏛️ 셋째, 책임의 전환: 자선 사업에서 생존 전략으로

과거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은 돈을 번 후에 좋은 일에 쓰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ESG는 다릅니다. 이것은 기업 활동의 모든 과정에 환경(E), 사회(S), 지배구조(G)를 녹여내, 회사가 앞으로도 계속 돈을 벌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필수’ 전략이죠. 투자자들이 재무제표만큼이나 ESG 성과표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유입니다.

결국** ESG는 ‘착한 기업’이 되자는 캠페인이 아닙니다. 다가올 위험을 더 정확하게 예측하고, 오랫동안 살아남아 이윤을 내기 위한 가장 똑똑하고 진화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규칙**인 셈입니다.

ESG 개념 이미지
ESG 개념 이미지

2장: 그림자 재고, 탄소 발자국 세는 법

“우리 회사는 탄소중립을 하겠습니다!” 라고 외치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그 말의 진짜 무게를 알려면, 우리는 먼저 ‘탄소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회계장부처럼 탄소 배출량을 기록하는 세계 공통의 약속, 바로 ‘스코프(Scope) 1, 2, 3’ 입니다.

복잡한 회계 장부와 계산기가 놓인 책상 이미지
복잡한 회계 장부와 계산기가 놓인 책상 이미지

  • Scope 1 (직접 배출): 우리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 회사가 직접 소유하고 관리하는 시설에서 연료를 태우며 바로 나오는 탄소입니다.
  • Scope 2 (간접 배출): 우리 공장에 전기를 대주는 발전소의 굴뚝 연기. 우리가 쓰는 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탄소죠.
  • Scope 3 (기타 간접 배출): 가장 까다롭고 거대한 영역입니다. 원재료를 캐고, 부품을 만들고, 물건을 실어 나르고, 고객이 제품을 사용하고, 마지막에 버리는 전 과정에서 나오는 모든 탄소를 포함합니다. 마치 장부에는 잡히지 않지만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그림자 재고’**와도 같죠.

어떤 기업이 ‘탄소중립’을 선언했을 때, 그 약속이 스코프 1, 2에만 그치는지, 아니면 가장 어려운 숙제인 스코프 3까지 끌어안는지를 보면 그 기업의 진심과 실력을 알 수 있습니다.

범위정의자동차 제조사의 예시
스코프 1기업이 직접 통제하는 배출원에서의 직접 배출공장 보일러, 회사 소유 테스트 차량의 배기가스
스코프 2구매한 에너지(전기 등) 생산 과정에서의 간접 배출공장과 본사에 공급되는 전력을 만드는 발전소의 배출
스코프 3전체 가치 사슬(공급망)에서 발생하는 모든 간접 배출철강 등 원자재 생산, 협력사 공장, 고객의 차량 운전, 폐차

3장: 네 개의 영혼, 네 개의 전략

탄소중립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해, 기업들은 저마다 다른 영혼을 가지고 다른 길을 갑니다. 마치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구하려는 네 명의 주인공처럼 말이죠.

1) 행동가: 파타고니아의 급진적 실험 👨‍🌾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 라고 적힌 광고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 라고 적힌 광고

파타고니아의 영혼은 **‘미션 중심’**입니다. 이들은 “우리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사업을 한다"는 하나의 문장을 위해 존재합니다.

  • “이 재킷을 사지 마세요”: 연중 가장 큰 쇼핑 대목인 블랙프라이데이에, “물건을 덜 사는 것이 최고의 환경 운동"이라며 스스로의 매출을 부정하는 광고를 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진정성에 감동한 팬들은 더욱 열광적인 지지자가 되었죠.
  • 지구를 살리는 맥주: 땅을 망치는 밀 대신, 오히려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특별한 곡물 ‘컨자’로 맥주를 만들었습니다. 단순히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넘어, 문제의 근원인 농업 시스템 자체를 바꾸려는 이들의 집요함을 보여줍니다.
  • 지구세(Earth Tax): 이익이 아닌 **매출의 1%**를 무조건 환경 단체에 기부합니다. 장사가 잘 되든 안 되든, 이 지구에서 사업하는 대가로 내는 세금이라는 철학입니다.

2) 기술자: 마이크로소프트의 담대한 도박 🤖

공기 중에서 탄소를 직접 빨아들이는 거대한 팬 시설 DAC의 컨셉 아트
공기 중에서 탄소를 직접 빨아들이는 거대한 팬 시설 DAC의 컨셉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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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가 신념으로 움직인다면, 마이크로소프트(MS)의 영혼은 **‘기술적 낙관주의’**입니다. 기술로 인류가 만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죠.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보다 흡수량을 더 많게 만들고(탄소 네거티브), 2050년까지는 회사가 세워진 이래 배출한 모든 탄소를 지구에서 지워버리겠다!

하지만 이 위대한 약속 뒤에는 거대한 딜레마가 있습니다. 바로 **‘AI 에너지 패러독스’**죠. MS가 이끄는 AI 혁명은 어마어마한 전기를 먹어치우고, 이는 엄청난 탄소 배출로 이어집니다. 가장 중요한 성장 엔진이 가장 위대한 기후 목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순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MS는 ‘지구를 위한 벤처 투자자’가 되었습니다. 공기 중 탄소를 직접 빨아들이는 기술(DAC)처럼, 아직은 공상과학 같아 보이는 최첨단 탄소 제거 기술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미래에 베팅하고 있습니다.

3) 거인: 한국 대기업들의 녹색 대전환 🚢

거대한 유조선이 항구에서 천천히 방향을 바꾸는 항공 촬영 이미지
거대한 유조선이 항구에서 천천히 방향을 바꾸는 항공 촬영 이미지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오면, 도전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제조업 중심의 거대 기업들이 방향을 트는 것은, 전속력으로 달리던 유조선을 돌리는 것처럼 어렵고 힘든 과제입니다.

  • 삼성전자의 책임감: 서울시 모든 가정이 쓰는 전기보다 1.76배나 많은 전기를 쓰는 삼성전자는 ‘2050년 탄소중립’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협력업체(스코프 3)를 관리해야 하는 어려움과 국내에 부족한 재생에너지라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있습니다. **‘책임 기반 전환’**의 무게를 보여주죠.
  • SK의 전략적 베팅: SK그룹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전략적 베팅’**을 선택했습니다. 미래 에너지의 핵심이 될 ‘수소’에 18조 원을 투자해, 수소를 만들고, 실어 나르고, 사용하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거대한 생태계를 직접 만들겠다는 담대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구분파타고니아 (행동가)마이크로소프트 (기술자)삼성전자 (거인)SK그룹 (거인)
핵심 영혼미션 중심기술적 낙관주의책임 기반 전환전략적 베팅
대표 목표지구가 유일 주주2030년 탄소 네거티브2050년 탄소중립2030년 전 세계 탄소 감축 1% 기여
핵심 전략소비 줄이기, 재활용, 기부탄소 제거 기술 투자초저전력 반도체, 재생에너지수소 생태계 구축
주요 과제‘반(反)성장’ 철학의 지속AI 에너지 패러독스방대한 공급망 관리대규모 투자의 불확실성

4장: 차고의 혁신가들, 게임의 판을 바꾸다

늦은 밤, 차고처럼 보이는 작업실에서 무언가에 몰두하는 젊은 엔지니어들
늦은 밤, 차고처럼 보이는 작업실에서 무언가에 몰두하는 젊은 엔지니어들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퍼즐은 거인들의 힘만으로 맞출 수 없습니다. 마지막 조각은 뜻밖의 장소, 세상을 바꿀 기술을 품고 차고와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는 스타트업들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기업이 모든 것을 직접 연구하고 개발했지만, 이제는 외부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사들이는 **‘오픈 이노베이션’**이 당연해졌습니다. 특히 탄소중립 시대에는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서로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하는 공생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대기업은 스코프 3라는 거대한 숙제를 풀기 위해 스타트업의 혁신 기술이 필요하고, 스타트업은 기술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대기업의 자본과 시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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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은 시장을 ‘끌어당기는 힘’을, 스타트업은 기술로 ‘밀어붙이는 힘’을 가지고, 함께 산업 전체를 진화시키는 것이죠.

결론: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앞으로 쓰일 미래를 상징하는 빈 책 페이지
앞으로 쓰일 미래를 상징하는 빈 책 페이지

이야기는 다시 이본 쉬나드에게로 돌아옵니다. 그가 보여준 기적 같은 행동은 이제 더 이상 한 괴짜의 외침이 아닙니다. 파타고니아의 ‘신념’, 마이크로소프트와 SK의 ‘도박’, 삼성전자의 ‘책임감’까지. 모든 기업은 각자의 언어와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의 생존법을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착한 기업이 결국 강한 기업’이 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수많은 연구 결과가 ESG 성과가 좋은 기업일수록 위기에 강하고, 오랫동안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기업의 성공 스토리는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성공의 정의는 단순히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지구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제 질문은 기업들이 이 거대한 모험에 참여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새로운 서사 속에서, 당신의 기업은 어떤 주인공이 되어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입니까?”

#ESG#탄소중립#파타고니아#이본쉬나드#래리핑크#블랙록#마이크로소프트#삼성전자#SK#기업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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