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찻집을 넘어,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잉태했던 한국 다방의 흥미로운 연대기를 탐험합니다.
- 한국 최초의 다방은 어디였으며 커피 문화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 다방이 예술가들의 아지트에서 청년 문화의 중심지로 변모해 온 과정
- 전통 다방이 오늘날의 현대적인 카페로 진화하기까지의 흐름
다방(茶房)은 단순히 차와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다방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집과 일터가 아닌 ‘제3의 공간’으로서 한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잉태하고 격동의 역사를 관통해 온 사회적 무대를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차(茶)의 방’이라는 이름과 달리, 다방의 역사는 모더니즘의 상징인 커피와 함께 해왔습니다.
엘리트의 사교장이자 예술가들의 안식처였고, 때로는 정치적 망명지이자 젊음의 해방구였으며, 마침내 오늘날의 현대적인 카페로 진화하기까지, 다방의 이야기는 지난 한 세기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제1장: 새로운 시대의 여명 – 다방 문화의 시작
한국의 커피와 다방의 기원은 여러 이야기가 얽혀 있어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지만, 각각의 ‘최초’는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마주한 한국 사회의 다양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황제를 위한 음료
이야기는 궁궐의 담장 안에서 시작됩니다. ‘가배(珈琲)’ 혹은 ‘양탕국(洋湯菊)‘이라 불리던 커피는 대한제국의 최상류층에게 먼저 소개되었습니다. 특히 고종 황제는 커피 애호가로 알려져 있으며, 덕수궁 정관헌(靜觀軒)에서 커피를 즐겼습니다. 1898년의 ‘김홍륙 독차 사건’은 커피가 당시 얼마나 희귀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엘리트의 상징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외교관의 살롱 – 손탁호텔
최초의 커피하우스로 종종 거론되는 곳은 1902년경 독일 여성 앙투아네트 손탁이 운영한 손탁호텔입니다. 이 호텔의 커피하우스는 외국 외교관과 대한제국 고위층의 사교 공간으로, 사실상 _고위층의 정치 무대에 가까웠다_는 점에서 이후 등장할 공공 다방과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경쟁하는 ‘최초’ – 두 카페 이야기
그렇다면 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다방은 어디였을까요? 오랫동안 1923년 일본인이 충무로에 개업한 ‘후타미(二見)‘로 알려졌으나, 1909년 11월 3일 자 『황성신문』에서 일본인이 남대문역에 ‘기사텐(끽다점,喫茶店)‘을 개업했다는 기사가 발견되면서 역사는 다시 쓰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다방 역사에서 진정한 전환점은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이 관훈동에 문을 연 **‘카카듀’**였습니다. 이곳은 한국인이 자본을 대고 직접 운영한 최초의 근대식 다방으로, 술을 팔던 일본식 ‘카페’와 달리 순수하게 문화를 교류하는 공간을 지향하며 이후 한국 다방 문화의 원형을 제시했습니다.
초기 다방의 역사와 특징
시설명 | 설립 추정 연도 | 주요 특징 및 의의 |
---|---|---|
손탁호텔 | 1902년경 | 서양식 호텔 내 커피하우스. 주로 외국 외교관과 한국 엘리트층을 위한 공간. 공공 다방의 전신으로 평가. |
기사텐(끽다점) | 1909년 | 일본식 커피숍(킷사텐). 1909년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된, 한국 최초의 공공 커피 판매점으로 추정되는 식민지 시대의 이식물. |
후타미(二見) | 1923년 | ‘기사텐’ 기사 발견 전까지 서울 최초의 근대식 다방으로 알려졌던 곳. |
카카듀(Kakadu) | 1927년 | 한국인이 설립하고 운영한 최초의 근대식 다방. 영화감독이 운영한 예술가들의 문화 중심지로, 이후 한국 다방의 정체성을 확립. |
제2장: 격동의 1930년대 – 아방가르드의 살롱
1920년대와 30년대는 다방이 명실상부한 한국 모더니즘의 중심지로 떠오른 황금기였습니다. 이 시대의 다방은 _주인인 예술가들이 직접 기획하고 연출한 하나의 문화 프로젝트_였습니다.
Advertisement
예술가의 아지트, ‘카카듀’의 탄생
영화감독 이경손의 ‘카카듀’는 촛불 조명, 인도풍 마포 테이블보, 봉산탈춤 가면 등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톨스토이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 등 실제 문화 행사가 열리는 살아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고전과 현대의 만남, ‘낙랑파라’
1932년 미술가 이순석이 연 ‘낙랑파라(樂浪parlour)‘는 이름부터 한국적 모더니즘을 창조하겠다는 의지를 담았습니다. 문학 단체 ‘구인회(九人會)‘의 지정석과도 같았으며, 시인 이상과 소설가 박태원의 단골집이었습니다. 박태원의 대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이곳이 등장합니다.
시인의 우울한 무대, ‘제비다방’
1933년, 천재 시인 이상(李箱)은 종로에 ‘제비다방’을 열었습니다. 건축가이기도 했던 그는 전면을 통유리로 마감하는 등 _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현대적 시도_를 선보였습니다. 그의 연인 금홍이 마담으로 있었던 이 다방은 이상의 문학 세계에 그대로 투영되었지만, 경영에는 실패하여 2년 남짓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제3장: 잿더미와 캔버스 – 전후(戰後) 한국의 다방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의 다방은 모더니스트들의 세련된 살롱에서 벗어나,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예술가들의 필수적인 생존 공간이자 안식처로 변모했습니다.
폐허의 도시, 피난 온 문화
전쟁으로 문화 기반 시설이 파괴되자, 다방은 그 빈자리를 채우는 다목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화가들은 전시회를 열었고, 문인들은 원고를 청탁받았습니다. 다방은 단순한 만남의 장소를 넘어, _생존을 위한 투쟁의 현장_이었습니다.
명동 로망스 – 이중섭의 세계
화가 이중섭의 비극적인 삶은 이 시기 다방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명동의 ‘돌체’, ‘모나리자’나 부산의 ‘밀다원’ 같은 다방을 전전하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습니다.
- 생존을 위한 예술: 동료 화가에게 가장 기본인 흰색 물감을 내밀며 밥을 굶었다는 신호를 보냈던 일화는 다방이 동료 예술가들의 연대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었음을 보여줍니다.
- 임시 캔버스: 종이를 살 돈이 없어 다방에서 주운 담뱃갑 속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은지화(銀紙畵)‘는 다방이 가난 속에서도 예술을 가능하게 한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이었음을 증명합니다.
- 예술가의 인간적 면모: 뻣뻣한 머리카락을 가라앉히려고 붕대를 감고 나타나는 등, 다방은 예술가들의 고뇌뿐 아니라 소소하고 인간적인 모습까지 공유하는 친밀한 공동체의 장이었습니다.
_전후의 다방은 예술적 실험의 장을 넘어,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처절한 용광로_였습니다.
제4장: 한 세대의 목소리 – 음악, 청춘, 그리고 혁명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다방은 청년 문화와 정치적 저항의 중심 무대가 되었습니다. 지식인의 아지트와 젊음의 에너지가 폭발했던 음악다방으로 분화했습니다.
제25강의실, ‘학림다방’
1956년 대학로에 문을 연 ‘학림다방’은 서울대생들의 사랑방이자 ‘제25강의실’로 불렸습니다. 특히 1970~80년대 군부 독재 시절, 학림은 _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학생들의 비밀 회합 장소이자 뜨거운 토론의 공간_이었습니다. 1981년 ‘학림 사건’은 이 다방이 한국 민주화 투쟁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음을 증명합니다.
Advertisement
유리방 속의 DJ – 음악다방의 시대
1970년대는 ‘음악다방’의 전성기였습니다. 개인 오디오가 귀했던 시절, 음악다방은 최신 외국 팝송 LP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였습니다. 유리 ‘뮤직박스’ 안의 DJ는 신청곡을 틀어주며 재치 있는 입담을 곁들이는, 당대 대중문화의 기획자였습니다.
제5장: 저무는 빛과 새로운 여명 – 거대한 분화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한국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맞으면서 전통 다방의 시대도 서서히 저물었습니다.
한 시대의 종말
가정용 오디오와 CD 플레이어의 보급, 노래방과 전자오락실 같은 새로운 놀이 공간의 등장은 다방의 입지를 좁혔습니다. 이 시기 등장한 ‘커피숍’은 밝고 현대적인 인테리어와 셀프서비스를 내세우며 신세대의 감각에 부응했고, 어느덧 _‘다방’은 구세대의 공간으로, ‘커피숍’은 신세대의 공간으로 양분_되었습니다.
어두운 그림자 – ‘티켓다방’의 출현
경쟁에서 밀려난 일부 다방은 ‘티켓다방’이라는 변칙적인 영업으로 활로를 모색했습니다. ‘레지’라 불리는 여종업원이 시간당 요금을 받고 손님과 동행하는 유사 성매매가 이루어졌고, 이는 수십 년간 ‘다방’이라는 단어의 이미지를 크게 훼손했습니다.
최후의 변신 – 스타벅스의 상륙
전통 다방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1999년 이화여대 앞에 1호점을 연 스타벅스의 등장이었습니다. 스타벅스를 필두로 한 프랜차이즈 카페는 효율성, 표준화된 맛, 그리고 ‘테이크아웃’이라는 새로운 소비문화를 전파하며 다방이 가졌던 복합적인 기능들을 해체시켰습니다.
비교: 70년대 다방 문화의 두 축
학림다방과 음악다방은 같은 ‘다방’이라는 이름 아래 있었지만, 그 역할과 성격은 명확히 달랐습니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가 품고 있던 두 가지 다른 열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단면입니다.
구분 | 학림다방 (정치적 반문화) | 음악다방 (사회적 반문화) |
---|---|---|
주요 고객 | 대학생, 지식인, 민주화 운동가 | 젊은 직장인, 대학생 |
핵심 역할 | 사회 비판, 학문 토론, 비밀 회합 | 최신 대중문화 향유, 이성과의 만남 |
상징성 | 저항과 지성의 요람, ‘제25강의실’ | 청춘의 해방구, ‘뮤직박스’와 DJ |
결론
한국 다방 역사는 단순한 음료의 유행사를 넘어, 우리 사회의 변화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카페 문화의 뿌리에는 지난 한 세기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들이 녹아 있습니다.
핵심 요약
- ‘제3의 공간’: 다방은 단순한 상업 시설을 넘어,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담는 중요한 사회적 무대였습니다.
- 시대의 자화상: 예술가의 살롱, 민주화의 토론장, 청년의 해방구 등 시대적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 정신의 계승: 비록 전통 다방의 형태는 사라졌지만, 창의와 교류를 위한 공간이라는 그 정신은 오늘날 수많은 카페에 계승되어 우리의 일상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날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향하는 것도, 어쩌면 과거 예술가들이 영감을 찾아 다방으로 향했던 발걸음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번에 카페에 가시면, 커피 한 잔에 담긴 이 흥미로운 역사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여러분에게 ‘카페’는 어떤 의미인지 댓글로 공유해주세요!
참고자료
- 다방 (r286 판) 나무위키
- 다방으로부터 비롯된 새로운 문화의 한 축 포항공대신문
- [브랜드의 문화사] 다방이야기1 브런치
- 다방(茶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권영심의 「커피와 차의 오글오글한 이야기」 손탁호텔, 최초의 커피하우스 한韓문화타임즈
- [커피이야기]고종에 커피 올린 손탁…국내 최초 바리스타 중도일보
- 한국 최초의 다방…커피 말고 ‘이것’도 팔았네 브라보마이라이프
- 경성(京城) 다방의 변천사 월간조선
- [한국 커피의 역사] 한국인 최초의 다방, 경성에 문을 열다 왈츠와 닥터만
- [배리스타 톡톡#2] 일본식 ‘카페’와는 품격이 달랐던 한국 최초의 ‘다방’ NBN미디어
- 경성 예술가들의 아지트, 낙랑파라 메일리
- 1933년 개업한 ‘제비’ 다방, 그 주인은 시인 이상이었다 중앙일보
- 서정주·구상·이중섭… 다방이 키운 예술가들 주간조선
- 학림다방 인문360
- [SPECIAL 7080] 학림다방-역사와 추억이 현재와 어우러진 곳 서울신문
- 예나 지금이나 학림다방은 여전히 핫 플레이스 준성키
- [최병렬]인기DJ를 스카웃했던 70년대 안양의 음악다방들 안양시민사회연대
- [이정학 교수의 커피 이야기] ⑦·(끝) 1980∼2000년대 이후 커피와 … 울산매일
- 스타벅스/대한민국 나무위키
- 현대인들이 카페를 사랑하는 이유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