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귀향, 한 그릇의 장맛에 담긴 무게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 장의 역사와 문화적 의미: 단순한 음식을 넘어 한 집안의 안녕과 역사를 담았던 장의 가치를 알아봅니다.
- 장맛을 결정하는 발효의 과학: 메주와 항아리 속에서 벌어지는 미생물의 경이로운 활동을 이해합니다.
- 다양한 전통 장의 종류와 현대적 변화: 지역별 특색 있는 장부터 오늘날 우리가 먹는 공장식 간장까지 살펴봅니다.
장(醬), 단순한 조미료를 넘어선 의미
신라의 명장 김유신은 백제와의 운명을 건 전투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던 그의 길이 공교롭게도 자신의 집 앞을 지나게 되었죠. 오랜 전란으로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오래였지만, 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앞둔 장수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의 고삐를 쥔 채 집을 지나치며, 대신 부하를 시켜 집에서 장(醬) 한 그릇을 떠오게 했어요. 잠시 후, 부하가 가져온 장을 맛본 김유신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습니다. 장맛이 예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는 그 한결같은 맛에서 노모의 건강과 집안의 평안을 확인했고, 비로소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전장으로 향했답니다.
저는 이 일화가 우리 한국인에게 한국 전통 장이 어떤 의미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 집안의 안녕과 질서를 가늠하는 척도이자, 가족 구성원의 마음을 잇는 정신적 교감의 매개체였죠. 장을 담그고 관리하는 과정은 1년 내내 이어지는 고되고 정밀한 노동으로, 집안의 평화와 부지런함 없이는 결코 좋은 맛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변치 않는 장맛은 집안이 무탈하다는 가장 확실한 증표**였고, 이는 전장으로 향하는 장수에게 그 어떤 전언보다 더 큰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을 거예요. 이처럼 한국의 간장과 된장은 단순한 음식의 재료를 넘어, 한 가정의 역사와 정신, 나아가 한 민족의 영혼을 담아내는 그릇이었습니다.
한국 장의 기원, 천년의 역사를 품다
한반도의 발효 문화는 그 뿌리가 매우 깊어요. 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는 3세기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문헌은 고구려인들이 “장양(藏釀)을 잘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장양’은 장 담그기, 술 빚기 등 발효 식품을 만드는 기술 전반을 의미해요.
그러나 한국 장의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주는 결정적인 기록은 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서기 683년 신문왕(神文王)이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비로 맞이할 때 보낸 폐백(幣帛) 예물 목록에 **장(醬)**과 **시(豉)**가 함께 포함되어 있었어요.
‘장(醬)‘과 ‘시(豉)’, 독창성의 시작
신문왕의 폐백 목록에 ‘장’과 ‘시’가 별개의 품목으로 나란히 기록된 점은 한국 장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단서예요.
여기서 ‘시(豉)‘는 발효시킨 콩 덩어리, 즉 오늘날 메주의 원형에 해당하는 고체 발효물을 의미하며, ‘장(醬)‘은 이 ‘시’를 소금물에 담가 우려낸 액체(간장)나 남은 건더기(된장)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해석됩니다.
이는 _하나의 발효 과정에서 액체 조미료와 고체 조미료라는 두 가지 결과물을 동시에 얻는 한국 고유의 장 제조법_이 이미 1,300여 년 전 신라 시대에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문헌적 증거입니다.
장독대, 집안의 신성한 공간이 되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 중 하나는 부엌도, 안방도 아닌 **장독대(醬督臺)**였어요. 집안에서 가장 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자리한 장독대는 단순한 장 보관 장소를 넘어, 그 집안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신성한 제단과도 같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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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잘 드는 곳에 정갈하게 놓인 장독대는 집안의 평화와 번영을 상징했습니다.
장 담그기, 과학을 품은 전통 의식
장을 담그는 일은 단순한 조리 과정이 아닌, 엄격한 금기와 절차가 따르는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 길일(吉日)의 선택: 장은 아무 날에나 담그지 않았어요. 반드시 책력을 보아 만물이 왕성하게 생동하는 ‘말날(午日)‘과 같은 길일을 택했죠.
- 금줄(禁繩)의 주술: 장을 담근 항아리에는 붉은 고추와 숯, 흰 종이를 꿰어 왼쪽으로 꼰 새끼줄인 금줄을 둘렀습니다. 이는 장이 외부의 사악한 기운과 오염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신성한 존재임을 의미했습니다.
- 몸과 마음의 정화: 장을 담그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해야 했어요. 목욕재계를 하고, 상가(喪家)나 다툼이 있는 곳의 출입을 삼갔으며, 험한 말을 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죠.
이러한 정성 속에서 탄생한 장맛은 그 집안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예언과도 같았어요.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이 망한다"와 같은 속담들은 장맛과 집안의 운명을 동일시했던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놀랍게도 이 신성한 풍습은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합리적인 미생물 관리법이었어요. 맑은 날을 택하고 금줄을 쳐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 것은 유해 잡균의 증식을 막고 외부 미생물에 의한 교차 오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효과적인 격리 조치였습니다.
항아리 속 과학, 한국 전통 장의 비밀
한국의 장이 빚어내는 깊고 복합적인 맛은 항아리 속에서 벌어지는 경이로운 미생물의 활동, 즉 ‘발효’라는 연금술의 결과물입니다.
볏짚과 공기 중의 미생물로 자연 발효되는 메주는 한국 장맛의 핵심입니다.
콩에서 메주로: 자연 미생물의 협업
장 담그기의 첫 단계는 잘 익은 콩을 푹 삶아 찧어 ‘메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볏짚으로 엮어 처마 밑에 매달아두면, 공기 중의 다양한 야생 곰팡이와 볏짚의 고초균(枯草菌, Bacillus subtilis) 등이 메주에 정착합니다.
이 미생물 군단, 특히 **황국균(黃麴菌, Aspergillus oryzae)**과 고초균은 콩의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탄수화물을 당으로 분해하는 강력한 효소를 생산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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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잘 띄운 메주를 소금물 항아리에 넣고 수개월이 흐르면, 메주의 성분들이 녹아 나온 검은 액체는 간장이 되고, 남은 건더기를 으깨어 따로 숙성시키면 된장이 된답니다.
이러한 ‘야생 발효’ 방식은 집집마다 다른 미생물 환경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포도밭의 토양과 기후가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테루아(Terroir)’ 개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_“집집마다 장맛이 다르다”_는 말은 과학적 사실인 셈이죠.
팔도의 장, 각기 다른 맛의 향연
한국의 장은 지역의 기후와 특산물과 결합하여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다채로운 얼굴로 발전해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장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 어육장(魚肉醬): 쇠고기, 꿩고기, 생선 등 귀한 재료를 메주와 함께 켜켜이 쌓아 숙성시킨 조선시대 궁중의 최고급 장입니다.
- 막장(Makjang): 메주를 빻아 보리나 밀과 섞어 짧은 기간에 속성으로 발효시킨 장으로, 경상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즐겨 먹어요.
- 청국장(Cheonggukjang): 삶은 콩을 통째로 2~3일 만에 단기 발효시킨 속성장으로, 특유의 강한 향과 뛰어난 건강 효능으로 잘 알려져 있죠.
쇠고기, 생선 등을 넣어 만든 어육장은 깊고 풍부한 감칠맛을 자랑합니다.
제주의 보물, 푸른콩장 이야기
제주의 ‘푸른콩장’은 토종 자원과 장인의 노력이 빚어낸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푸른독새기콩’이라 불리는 토종 푸른콩으로 담그는데, 단맛이 강하고 차진 특성이 있습니다. 한때 사라질 뻔했던 이 푸른콩장은 장인들의 노력으로 부활하여 2013년 국제슬로푸드협회의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등재되었습니다.
제주 토종 ‘푸른독새기콩’으로 만든 푸른콩장은 제주의 소중한 미식 유산입니다.
현대의 장, 전통과 산업의 갈림길에서
오늘날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장은 대부분 현대적인 산업 공정을 통해 생산됩니다. 온도와 습도가 제어되는 환경에서 순수 배양한 종균을 사용해 1년 내내 균일한 품질의 장을 대량으로 만들어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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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인 공장 설비는 균일한 품질의 장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해줍니다.
비교/대안
동아시아 콩 발효 조미료 비교
한국의 장 제조법은 메주 하나로 간장과 된장을 동시에 얻는다는 점에서 중국, 일본과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특징 | 한국 (장, 醬) | 일본 (미소, 쇼유) / 중국 (두반장 등) |
---|---|---|
주요 생산물 | 간장(액체), 된장(고체) 동시 생산 | 일: 쇼유(액체), 미소(고체) 별도 생산 |
중: 장유(액체), 두반장/두시(고체) 등 | ||
핵심 재료 | 콩, 소금, 물 | 일: 콩, 소금, 물, 코지(쌀/보리 배양) |
중: 콩, 소금, 물 외 밀가루, 고추 등 첨가 | ||
제조 방식 | 메주(자연 발효 콩 덩어리) 사용 | 일: 코지를 삶은 콩과 섞어 발효 |
중: 다양한 방식, 직접 균 접종 방식 다수 |
시판 간장, 무엇이 다를까?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간장들은 제조 방식에 따라 맛과 용도가 다릅니다.
종류 | 주요 특징 | 추천 용도 |
---|---|---|
한식간장 (조선간장) | 콩, 소금, 물만 사용. 색이 옅고 짠맛과 구수한 맛이 강함. | 국, 찌개, 나물 무침 |
양조간장 (왜간장) | 콩+밀로 만든 코지 사용. 색이 진하고 단맛, 감칠맛 풍부. | 회, 부침개 소스, 조림, 볶음 |
산분해간장 | 염산으로 단백질 분해. 발효 풍미가 없고 저렴. | |
혼합간장 | 양조간장 + 산분해간장. | 양조간장 함량을 확인하는 것이 좋음. |
체크리스트 또는 단계별 가이드
전통 장 담그기, 핵심 3단계
- 메주 만들기 (늦가을): 잘 삶은 콩을 찧어 모양을 빚고, 볏짚으로 묶어 통풍이 잘되는 곳에서 2~3개월간 띄웁니다.
- 장 담그기 (정월): 잘 띄운 메주를 깨끗이 씻어 소금물을 채운 항아리에 넣고 숯, 고추, 대추를 띄웁니다.
- 장 가르기 및 숙성 (40~60일 후): 소금물이 검붉은 간장이 되면, 메주를 건져내 으깨어 된장으로 따로 숙성시키고, 간장은 달여서 보관합니다.
결론
신라의 장수 김유신 이야기부터 현대의 스마트 팩토리까지, 한국 전통 장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닌 우리 민족의 역사와 지혜 그 자체였습니다.
- 장은 과학입니다: 장은 미생물의 활동을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관리해 온 선조들의 정교한 과학 기술의 산물이었습니다.
- 장은 문화입니다: 장독대를 신성시하고 장 담그기를 의식처럼 여겼던 문화는 자연과 조응하며 살고자 했던 한국인의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 장은 역사입니다: 집집마다 다른 장맛은 각 가정의 손맛과 역사를 담은 살아있는 기록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공장에서 빠르고 균일하게 생산된 장을 손쉽게 소비하지만, 그 편리함 속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정성이 함께 빚어내는 깊이, 즉 한 민족의 영혼이 담긴 **‘시간의 맛’**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 집 식탁 위의 간장과 된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 안에 담긴 긴 시간의 이야기를 느껴보세요.
참고자료
- 간장 나무위키
- [만물상]중국산 된장·고추장 조선일보
- [맛 스틸러] 韓·中·日 중 ‘된장’의 원조는? 조선일보
- 안정윤 큐레이터가 추천하는 국립민속박물관
- 한국사 탐(探) - 한국의 맛, 전통 장 / YTN DMB Youtube 링크
- 장류의 역사 한국콩연구회
- 미소제조법으로 만드는 공장식 된장 지역N문화
- ‘전통 장 담그기’를 배워봅시다 오마이뉴스
- 간장(간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금줄 한국민속대백과사전
- 속담/대한민국 나무위키
- 된장 속에 담긴 발효 과학 / YTN 사이언스 YouTube
- 된장 종류별 제조법 한식의 뿌리, 된장 램프쿡
- 콩 발효식품(된장 및 간장)에서 분리된 Bacillus 그룹의 다양성과이들의 청국장 발효특성 한국식품저장유통학회지
-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의 발효음식 MICHELIN Guide
- 제주푸른콩장 2013년 등재 램프쿡
- [퍼즐]사라져가는 제주푸른콩장…이걸 찬물에 풀어 마셔보니 중앙일보
- 한식 읽기 좋은 날 한식진흥원
- 맛있는 된장농원 여행…전독간장, 어간장, 어육장을 찾아서 프레시안
- 된장 나무위키
- 청국장 나무위키
- 간장 구별법 헷갈리셨죠? 시사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