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의 민족’이라는 믿음과 ‘코리안 바비큐’ 열풍 사이, 한민족 육식의 역사를 파헤칩니다.
- 고대부터 현대까지 시대별 육식 문화의 의미 변화를 이해합니다.
- ‘한민족은 채식주의자’라는 통념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을 파악합니다.
- 현대 한식에서 육류와 채소가 이루는 균형의 의미를 재발견합니다.
우리는 정말 ‘채소의 민족’이었을까?
푸릇한 나물과 김치로 가득한 밥상을 보면 우리는 ‘채소의 민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세계를 휩쓴 ‘코리안 바비큐’ 열풍을 보며 한민족 육식 문화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이 질문의 답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반도의 지리, 사상, 역사를 관통하는 복잡한 서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고대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부터 시간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한식 밥상에 펼쳐진 다채로운 채소 반찬은 ‘채식의 민족’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육식의 역사가 숨어있다.
고대의 증언: 무덤이 말해주는 육식의 의미
고대, 특히 삼국시대의 무덤은 과거를 보여주는 타임캡슐입니다. 무덤에 함께 묻는 **부장품(副葬品)**은 죽은 이가 사후 세계에서도 현세의 삶을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어, 당시 지배계급의 식문화를 엿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땅속에서 발견된 육식의 흔적
초기 삼국시대 마한(馬韓) 지역에서는 장례에 소나 말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제수용으로 추정되는 은어(銀魚) 뼈가 발견되었습니다.
신라와 가야 고분에서는 말, 멧돼지, 닭, 심지어 상어 뼈까지 출토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지배층의 식단이 가축, 사냥감, 해산물을 아우르는 다채로운 육식으로 구성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가장 궁극적인 희생, 순장(殉葬)
고대 육식 문화의 정점은 순장 풍습에서 드러납니다.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시종이나 동물까지 함께 묻는 이 의식은, 동물이 단순한 식량을 넘어 **주인의 권위와 부를 상징하는 필수적인 ‘재산’이자 ‘동반자’**였음을 의미합니다.
순장된 동물은 육식이 생존 수단을 넘어 지배계급의 권력을 과시하는 상징이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증거들은 지배층의 무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사회에 깊은 식이 계층화가 존재했음을 말해줍니다. 대다수 평민의 식단은 철학적 선택이 아닌 경제적 현실로 인해 곡물과 채소가 중심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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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시대: 육식을 멀리하다
삼국시대 후기와 고려시대(918-1392)에는 불교가 국교가 되면서 불살생(不殺生) 교리가 육식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고려 왕실은 종종 도축 금지령을 내렸고, 육식을 피하는 행위는 국가적으로 장려되는 덕목이었습니다. ‘고결한 채식주의자’ 이미지가 문화적 의식 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13세기 몽골의 침입은 고려 식문화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유목민족인 몽골인들의 영향으로 설렁탕 같은 요리가 전래되는 등 육식 문화가 다시 활발해졌습니다. 이처럼 고려 시대는 육식에 대한 도덕적, 철학적 고민이 처음으로 사회적 담론이 된 시기였습니다.
유교 국가 조선: 제사상과 육식의 부활
성리학적 유교 질서를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1392-1910)에 육식의 위상은 또 한 번 극적으로 변화합니다. 불교에서 죄악시되던 육식은 유교의 가장 중요한 의례인 제사(祭祀)에서 신성한 의무로 탈바꿈했습니다.
죄악에서 신성한 의무로
조상 숭배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 사회에서 제사상에 고기를 올리지 않는 것은 심각한 결례였습니다. 고기를 구해 바치는 행위는 유교적 효행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조선 정부는 제수용 소와 말을 기르기 위해 국영 목장을 운영하고, 도축을 전문으로 하는 현방(懸房)을 허가하는 등 육류 공급을 체계적으로 관리했습니다.
신분과 부의 상징, 소고기
조선시대 육식 문화의 정점에는 소고기가 있었습니다. 소는 농경 사회의 핵심 노동력이었기에, 국가는 우도금(牛屠禁) 정책으로 사적인 도축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이러한 희소성은 소고기를 제사, 왕실 연회, 그리고 양반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품으로 만들었습니다. 반면 돼지고기와 닭고기는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워 백성들도 특별한 날에는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근대화와 전쟁, 그리고 육식의 대중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농업 기반은 파괴되었고, 극심한 빈곤 속에서 고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혹독한 결핍은 ‘한민족은 본래 채식을 했다’는 통념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197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 덕분이었습니다. 육류에 대한 잠재된 욕구가 폭발했지만, 여전히 비싼 소고기는 대중화되기 어려웠습니다. 이 수요를 충족시킨 것이 바로 돼지고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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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한국 현대 식문화의 아이콘, 삼겹살이 탄생했습니다. 본래 비선호 부위였던 삼겹살은 저렴한 가격 덕분에 노동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불판에 둘러앉아 고기를 굽는 문화는 고된 하루의 피로를 풀고 동료애를 다지는 사회적 의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비교: 시대별 육식 문화 변천 요약
시대 | 주요 육류 및 소비층 | 문화적 의미 및 증거 |
---|---|---|
고대 | 사냥감(멧돼지), 가축(소, 말), 어류 / 왕족, 귀족 | 부와 권력의 상징, 내세를 위한 제물. 무덤 부장품과 순장 풍습. |
고려 |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제한적) / 귀족, 몽골인 | 불교 영향으로 육식 기피가 미덕이었으나, 몽골 영향으로 다시 활성화. |
조선 | 소고기(의례용), 돼지고기, 닭고기 / 양반, 귀족 | 유교 제사를 위한 신성한 의무. 소고기는 국가가 통제하는 사치품. |
현대 | 돼지고기(삼겹살), 소고기, 닭고기 / 전 국민 | 경제적 풍요의 상징이자 일상 음식. 공동체 유대 강화. |
결론
“한민족은 원래 채식주의자였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이념에 따른 채식주의 공동체였던 적이 없습니다.
- 핵심 요점 1: 경제적/지리적 한계로 인해 대다수는 역사적으로 채소 위주의 식사를 했지만, 지배층에게 육식은 언제나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 핵심 요점 2: 육식의 의미는 시대의 사상에 따라 변했습니다. 불교 사회에서는 성찰의 대상이었고, 유교 사회에서는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 핵심 요점 3: 현대의 삼겹살 문화는 경제 성장과 사회적 요구가 만들어낸 발명품이며, 육식이 모두의 일상적 즐거움이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한식의 진정한 정수는 육류와 채소의 완벽한 균형과 조화에 있습니다. 다음 한식 밥상을 마주할 때, 고기 한 점과 나물 한 젓가락에 담긴 이 깊은 역사를 음미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