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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창세신화: 태초의 거인과 신의 배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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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기원에 관한 한민족의 위대한 대서사시를 만나봅니다.

  • 거대한 여성 신이 몸으로 세상을 빚어낸 원초적 창조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가 ‘신성한 배신’에서 시작되었다는 독특한 세계관을 이해합니다.
  • 이승과 저승이 어떻게 나뉘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 담긴 철학을 알아봅니다.

우리가 창세신화를 이야기할 때, 으레 그리스-로마나 북유럽 신화, 혹은 7일간의 천지창조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깊고 광활한 대서사시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무당들이 굿판에서 부르던 장엄한 노래, 즉 무가(巫歌)의 형태로 생명력을 이어온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입니다.

이 글에서는 한민족 창세신화의 세 가지 큰 줄기인 마고와 설문대할망, 창세가, 그리고 천지왕본풀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가장 원초적인 상상력이 빚어낸 장대한 이야기의 문을 열어보겠습니다.

1부: 거인 할머니, 세상을 빚다 – 마고와 설문대할망

한민족 창세신화의 가장 원초적인 층위에는, 지성과 언어가 아닌 몸과 행위로 세상을 창조한 거대한 여성 창조신이 자리합니다.

대지의 어머니, 마고 할미

이야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거인 할머니, **마고할미(麻姑 할미)**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녀는 단순히 세상을 만든 존재가 아니라, 그녀의 몸 자체가 곧 세상의 풍경이 되는 원초적 신입니다.

  • 산과 섬: 거대한 치마폭에 흙을 퍼 담아 날라 만들었습니다.
  • 강과 하천: 그녀가 눈 오줌, 즉 방뇨(放尿)의 결과물입니다.
  • 언덕과 바위: 그녀의 배변이나 가지고 놀던 공깃돌이었습니다.

마고할미의 치마폭에서 쏟아진 흙으로 만들어졌을지 모를 장엄한 산의 모습.
마고할미의 치마폭에서 쏟아진 흙으로 만들어졌을지 모를 장엄한 산의 모습.

이처럼 창조가 출산과 배설 같은 지극히 육체적 행위로 묘사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유대-기독교 신화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한민족의 창세신화는 이처럼 땅과 몸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원초적 자연관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며 대지모신의 신성은 격하되기도 했습니다. 강원도 삼척의 서구할미는 요물로 묘사되거나, 창조 여신 마고는 ‘마귀할멈’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이는 토착 여성 중심의 신앙이 남성 중심적 유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되는 과정을 신화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입니다.

비극의 창조주, 제주 설문대할망

거인 여신 신화의 가장 풍부한 이야기는 제주도의 설문대할망 설화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창조의 힘을 넘어 깊은 비애를 간직한 비극적 주인공입니다.

  • 한라산과 오름: 치마폭으로 흙을 날라 한라산을 만들었고, 헤진 구멍으로 떨어진 흙 부스러기가 368개의 오름이 되었습니다.
  • 미완으로 끝난 다리: 명주 100동으로 속옷 한 벌만 지어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했지만, 99동밖에 모이지 않아 꿈이 좌절됩니다. 신과 인간의 소통이 아쉽게 단절되는 순간입니다.
  • 슬픔의 죽 한 그릇 (오백장군 전설): 굶주리는 500명의 아들을 위해 죽을 쑤다가 솥에 빠져 죽고 맙니다. 이 사실을 모른 아들들은 어머니의 살이 든 죽을 먹게 되고, 뒤늦게 사실을 알고 통곡하다 모두 돌이 되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한라산 영실의 기암괴석, 오백장군 바위입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돌이 되었다는 오백장군의 전설이 깃든 한라산 영실의 풍경.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돌이 되었다는 오백장군의 전설이 깃든 한라산 영실의 풍경.

설문대할망의 이야기는 단순한 지형 생성 신화를 넘어, 고독, 모성애, 희생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제주도의 풍경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신의 슬픔과 아픔이 서려 있는 장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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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된 신화 – 『부도지(符都誌)』의 마고

『부도지』에 기록된 마고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후대에 고도의 철학적, 민족적 사유가 덧입혀진 재해석된 신화입니다.

  • 이상향, 마고성: 인류가 욕망 없이 살아가던 완벽한 유토피아.
  • 타락과 추방: 금단의 열매인 ‘포도’를 맛본 인류는 감각적 쾌락에 눈을 뜨고 순수성을 잃어 마고성에서 추방됩니다.
  • 잃어버린 본성을 찾아서 (복본, 復本): 추방된 인류는 잃어버린 본성을 되찾기 위한 장대한 여정을 시작하며, 이 사명이 단군에게까지 이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도지』의 마고는 토착 신의 이름 위에 도교적 세계관과 민족주의를 결합하여, 우주 창조에서 고조선 건국까지를 하나의 통일된 서사로 엮어내려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2부: 최초의 배신과 비틀린 세상 – 창세가(創世歌)

이제 무대는 여성 창조주에서 남성 창조주로, 그리고 한민족 창세신화의 핵심 주제인 **‘우주적 불의(cosmic injustice)’**로 옮겨갑니다.

미륵,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다

함경도 서사무가 『창세가』는 태초의 혼돈 속에서 나타난 최초의 남신 **미륵(彌勒)**의 이야기입니다.

  • 세상의 설계: 하늘과 땅을 떼어놓고 구리 기둥으로 떠받칩니다.
  • 우주의 질서: 해와 달이 둘씩 있던 혼돈을 바로잡아 하나씩만 남기고, 나머진 별을 만듭니다.
  • 인류의 탄생: 하늘에서 내려온 벌레가 자라 다섯 쌍의 부부가 되고, 이들로부터 인류가 번성했다는 ‘천손의식’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지배권을 건 신들의 대결

미륵이 창조한 세상에 도전자 **석가(釋迦)**가 나타나 세상의 지배권을 건 대결을 제안합니다. 미륵은 두 번의 대결(병 끌어올리기, 강 얼리기)에서 가볍게 승리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대결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도둑맞은 꽃과 세상의 모순

마지막 대결은 잠을 자면서 무릎에 먼저 꽃을 피우는 시합이었습니다.

  • 비열한 속임수: 정직한 미륵의 무릎에는 모란꽃이 피었지만, 잠든 척하던 석가는 자신의 무릎에 꽃이 피지 않자 미륵의 꽃을 꺾어 자기 무릎에 옮겨 꽂습니다.
  • 위대한 포기와 저주: 석가의 비열함에 환멸을 느낀 미륵은 세상을 넘겨주고 떠나며, 그가 다스릴 세상은 온갖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말세(末世)‘가 될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미륵의 무릎에서는 피었지만 석가의 무릎에서는 피지 않았던, 승패를 가른 운명의 꽃.
미륵의 무릎에서는 피었지만 석가의 무릎에서는 피지 않았던, 승패를 가른 운명의 꽃.

개인적으로 저는 이 ‘부정한 승리’라는 모티프가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왜 세상은 노력한 만큼 공평하지 않을까? 라는 오랜 질문에, 우리 조상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신부터가 속임수로 이겼기 때문’이라는, 놀랍도록 현실적이면서도 비판적인 답을 내놓은 셈입니다. 여러분은 이 신화적 설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3부: 이승과 저승은 왜 나뉘었는가 – 천지왕본풀이

제주도의 『천지왕본풀이』는 경쟁 모티프를 더욱 정교한 구조로 발전시켜 삶과 죽음의 분할을 설명합니다.

천상왕의 쌍둥이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

하늘의 왕 천지왕은 지상에 내려와 총멩부인과 인연을 맺고 쌍둥이 아들 **대별왕(형)**과 **소별왕(동생)**을 낳습니다. 이들은 하늘의 질서를 어지럽히던 여분의 해와 달을 활로 쏘아 떨어뜨려 안정된 세상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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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반복된 비극적인 형제의 경쟁

질서가 잡히자 누가 산 자의 세계인 이승(이승)을, 누가 죽은 자의 세계인 저승(저승)을 다스릴지를 두고 경쟁이 벌어집니다. 경쟁 방식은 역시 ‘꽃 피우기’였습니다.

  • 정직한 형 대별왕의 씨앗에서는 아름다운 ‘번성꽃’이 피어납니다.
  • 야심만만한 동생 소별왕의 씨앗에서는 시든 꽃이 피어납니다.
  • 패배를 깨달은 소별왕은 형이 잠든 틈을 타 두 사람의 꽃을 몰래 바꿔치기합니다.

이승은 혼탁하게, 저승은 맑게

대별왕은 동생의 속임수를 알았지만 결과를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이 결정으로 우주는 두 개의 질서로 나뉩니다.

  • 소별왕 (사기꾼) → 이승의 지배자: 그 결과 우리가 사는 이승은 살인, 도둑질, 거짓말 같은 온갖 혼란과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이 되었습니다.
  • 대별왕 (정직한 이) → 저승의 지배자: 그 결과 저승은 명확한 법과 질서가 지배하는 공정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 신화는 왜 착한 사람이 고통받고 악한 자가 번영하는가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궁극적인 정의는 죽음 이후에 실현된다는 강력한 위안을 제공합니다.

비교: 창세가 vs 천지왕본풀이

두 경쟁 이야기는 비슷한 구조를 가지지만, 결론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입니다.

특징창세가 (創世歌)천지왕본풀이 (天地王本풀이)
전승 지역함경도 (북부)제주도 (남부)
주인공미륵 (창조주) vs. 석가 (찬탈자)대별왕 (형) vs. 소별왕 (동생)
핵심 갈등세상 전체의 지배권이승과 저승의 통치권
결과부정한 석가가 승리하여 세상을 다스림부정한 소별왕이 이승을, 정직한 대별왕이 저승을 다스림
세상 결함 설명지배자가 비열한 찬탈자이기 때문이승은 사기꾼이, 저승은 정직한 이가 다스리기 때문

결론

한민족의 창세신화는 세상의 기원과 모순에 대한 독특하고 깊이 있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 핵심 요점 1: 세상은 거대한 어머니 신의 몸에서 비롯된 물리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 핵심 요점 2: 세상의 불완전함은 인간의 원죄가 아닌, 신성한 권력 투쟁에서의 ‘부정한 승리’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 핵심 요점 3: 이승의 불의는 저승의 정의로 균형을 맞춘다는 정교한 도덕적 우주론을 통해 삶의 고통을 위로합니다.

이 신화들은 박물관에 잠든 유물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투영된 살아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한민족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한 위대한 창세의 대서사시입니다.

참고자료
  • 국학연구원 링크
  • 위키백과 링크
  • YouTube 링크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링크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창세신화 링크
  • 디지털한국학: 마고할미 링크
  • 나무위키: 마고할미 링크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설문대할망 링크
  • 지역N문화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창세가 링크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창세가 링크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천지왕본풀이 링크
#창세신화#마고할미#설문대할망#창세가#천지왕본풀이#한국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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