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장 위, 마법의 가루
여러분도 기억하시나요? 어릴 적, 어머니의 부엌 찬장 한편에 얌전히 자리 잡고 있던 그 빨갛고 하얀 포장의 조미료 통을 말이에요. 우리에겐 ‘미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죠.
찌개 맛이 어딘가 2% 부족할 때, 나물무침의 감칠맛이 아쉬울 때면 어머니는 비밀 병기처럼 이 하얀 가루를 한 꼬집 집어넣으셨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음식 전체의 맛이 조화롭게 살아났죠. 우리는 그 맛을 ‘어머니의 손맛’이라 불렀지만, 속으로는 저 마법의 가루 덕분이라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만약 이 단순한 조미료가, 사실은 100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거대한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면 믿으시겠어요? 한 일본 과학자의 고뇌에 찬 발견에서부터, 조국의 자존심을 걸고 기술을 품어온 한국인 사업가의 집념, 금반지와 스웨터를 내건 거대 기업들의 피 튀기는 전쟁, 그리고 전 세계를 뒤흔든 오해와 누명까지.
지금부터 찬장 속 먼지 쌓인 조미료 통에 숨겨진, 우리가 몰랐던 MSG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제5의 맛, 도쿄의 실험실에서 태어나다
운명을 바꾼 저녁 식탁
이야기는 20세기 초, 근대화의 열기로 뜨거웠던 일본 도쿄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도쿄 제국대학의 화학자였던 이케다 기쿠나에 교수는 남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어요. 독일 유학 시절, 독일인들의 건장한 체격을 보며 일본인의 영양 상태를 개선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고 돌아왔기 때문이죠. 이는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과학자의 진심 어린 소명이었습니다.
운명의 날은 1907년의 어느 저녁이었습니다. 아내가 끓여준 다시마 국물을 맛보던 그는 문득 혀끝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각과 마주합니다. 달지도, 짜지도, 시지도, 쓰지도 않은 제5의 맛이었죠. “이 국물 맛의 비결이 뭐요?” 그의 물음에 아내는 그저 다시마로 국물을 냈을 뿐이라고 답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평범했던 저녁 식탁은 위대한 발견의 현장으로 변모했습니다.
‘우마미’의 탄생과 ‘아지노모토’의 시작
이케다 교수는 곧장 실험실로 달려가 다시마의 성분을 파고들었습니다. 수많은 다시마를 끓이고 졸이는 고된 연구 끝에, 마침내 이 독특한 맛의 근원이 ‘글루탐산’이라는 아미노산임을 밝혀냈습니다. 그는 이 새로운 맛에 ‘맛있다’는 뜻의 일본어 ‘우마이(うまい)’를 따와 **‘우마미(うまみ, 감칠맛)’**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죠.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글루탐산에 나트륨을 결합시켜 안정적이고 물에 잘 녹는 하얀 결정체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처음 등장한 L-글루탐산 나트륨, **MSG(Monosodium Glutamate)**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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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꿈은 이 ‘우마미’를 통해 모든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즐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909년, 그는 사업가와 손을 잡고 ‘맛의 정수(Essence of Taste)’라는 의미를 담은 **‘아지노모토(味の素)’**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아지노모토는 일본의 식탁을 빠르게 점령했고, 훗날 이케다 기쿠나에 교수는 일본 10대 발명가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한 한국인 사업가의 담대한 도전
폐허 위에서 싹튼 결심
시간은 흘러 1950년대,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대한민국. 시장은 온갖 외제품, 특히 일본 제품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일제강점기부터 우리 입맛을 사로잡았던 아지노모토는 쌀값의 수십 배에 달하는 비싼 가격에 암암리에 팔려나가고 있었죠.
이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한 젊은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임대홍. 훗날 대상그룹의 창업주가 되는 그는 결심합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 자본으로 국산 조미료를 만들겠다.” 그의 결심은 단순한 사업적 포부가 아닌, 식민의 잔재를 걷어내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려는 뜨거운 애국심이었습니다.
기술을 향한 처절한 사투
1955년 봄, 그는 무작정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조미료 공장에 잡역부로 취직했습니다. 정식 기술 제휴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던 시절이었죠. 그는 일본인들의 멸시와 수모를 견디며 어깨너머로 제조 공정을 익혔습니다. 이는 산업 스파이라기보다는, 오직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한 남자의 처절한 사투에 가까웠습니다.
1년 만에 핵심 기술을 터득하고 돌아온 그는 1956년, 부산의 작은 공장에서 마침내 대한민국 1호 국산 조미료를 탄생시킵니다.
한국의 전설, ‘미원’의 탄생
그는 제품의 이름을 ‘미원(味元)’, 맛의 으뜸이라 지었습니다. 일본 ‘아지노모토(味の素)’의 ‘소(素)’를 ‘원(元)’으로 바꾼 절묘한 작명이었죠. 상징으로는 한국 전통 궁중요리 용기인 ‘신선로’를 그려 넣어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습니다.
미원의 성공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조금만 넣으면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아진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의 상인들이 공장 앞에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미원은 순식간에 아지노모토를 몰아내고 모든 가정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으며, 전후 한국 산업 부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조미료 전쟁: 금반지와 스웨터가 싸울 때
거인의 등장, 전쟁의 서막
미원이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1963년, 시장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납니다. 당시 설탕 사업의 강자였던 삼성그룹의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이 **‘미풍(美豊)’**을 출시하며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이로써 한국 식품업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조미료 전쟁’**의 막이 올랐습니다.
1차 대전: 경품과 사은품의 시대
1970년대, 두 회사의 경쟁은 상상을 초월하는 마케팅 전쟁으로 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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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제당(미풍): “빈 봉지 5장이면 고급 스웨터를 드립니다!”
- 대상(미원): “저희는 빈 봉지 1장이면 순금 반지를 드립니다!”
이들의 경쟁은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되어 “조미료 회사 덕에 우체국이 돈 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결국 경쟁이 과열되자 정부가 직접 나서서 경품 행사를 중지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졌죠.
흑색선전과 이병철의 한마디
마케팅으로 승부가 나지 않자, 전쟁은 어두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미원은 대만산 독사를 갈아 만든 뱀가루”라는 악의적인 루머가 퍼진 것입니다. 미원은 해명 광고를 내느라 진땀을 빼야 했습니다.
하지만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의 막강한 공세에도 미원의 아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한국인의 입맛에 깊이 각인된 ‘조미료는 미원’이라는 공식은 너무나 강력했죠. 이 쓰라린 패배에 대해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훗날 자서전에 전설적인 한마디를 남깁니다.
“세상에서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자식과 골프, 그리고 미원이다.”
이 한마디는 미원이 단순한 상품을 넘어 한 시대를 지배한 문화적 아이콘이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찬사였습니다.
악마의 옷을 입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공포
미원이 1차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거대한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1968년 미국, 한 의사가 중국 음식을 먹은 뒤 두통과 무력감을 느꼈다는 경험을 의학 저널에 기고합니다. 이 증상에 **‘중국음식점 증후군(CRS)’**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사람들은 그 원인으로 MSG를 지목했습니다.
과학적 근거는 희박했지만, 공포는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갔습니다. MSG는 ‘과학의 기적’에서 하루아침에 ‘유해한 화학 첨가물’로 낙인찍혔습니다.
CJ의 신의 한 수: 공포를 기회로
이 전 지구적 공포는 대한민국 조미료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1차 전쟁에서 패배했던 제일제당은 시장의 판 자체를 바꾸기로 결심합니다. ‘인공’이 아닌 ‘자연’, ‘단순한 맛’이 아닌 ‘집밥 같은 깊은 맛’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변화를 간파한 것입니다.
1975년, 제일제당은 쇠고기와 채소 국물 맛을 표방한 종합 조미료, **‘다시다’**를 출시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MSG 유해성 논란을 영리하게 활용했죠. ‘고향의 맛’이라는 따뜻한 슬로건과 국민 어머니 김혜자 배우를 모델로 내세워 ‘자연스럽고 건강한 조미료’라는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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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순수 MSG였던 미원은 졸지에 ‘화학 조미료’의 대명사가 되어 외면받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
결과는 극적이었습니다. 다시다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조미료 시장의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1차 전쟁의 패자였던 CJ가, MSG에 대한 공포를 등에 업고 마침내 숙적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이 정복하지 못했던 미원의 철옹성은, 총칼이 아닌 **‘자연 대 화학’**이라는 이야기의 힘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한 꼬집에 담긴 진실
수십 년간 MSG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부엌 한구석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결국 진실의 편이었습니다.
수많은 의혹들은 수십 년에 걸친 엄격한 검증을 통해 대부분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세계보건기구(WHO)와 유엔식량농업기구(FAO): MSG를 ‘인체에 매우 안전한 식품 첨가물’로 규정. 1일 섭취 허용량 설정이 필요 없을 정도.
- 미국 식품의약국(FDA): 소금, 후추처럼 ‘일반적으로 안전하다고 인정되는 물질(GRAS)’ 목록에 포함.
오히려 MSG는 같은 양의 소금보다 나트륨 함량이 3분의 1 수준이라, 잘 쓰면 전체 나트륨 섭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습니다.
이제 MSG는 긴 오해의 터널을 지나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어머니의 부엌 찬장을 떠올려 봅니다. 그곳에 놓인 하얀 가루는 위험한 화학물질이나 신비한 뱀가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던 한 과학자의 꿈, 조국의 자존심을 지키려던 사업가의 투혼,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기업들의 치열한 전쟁, 그리고 우리가 음식과 맺는 복잡한 관계에 대한 100년의 거대한 드라마였습니다. 그 하얀 가루는 악당이 아니라, 우리 식탁 위에서 펼쳐진 한 편의 대서사시, 그 자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