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 경제

행동경제학, 합리적 인간의 신화를 깨다

phoue

7 min read --

경제학의 분열된 자아,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향한 도전을 탐구합니다.

  • 주류 경제학의 ‘합리적 인간’ 가정이 왜 비판받는지 이해합니다.
  • 행동경제학의 핵심 이론(전망 이론, 넛지 등)을 구체적 사례로 배웁니다.
  • 두 경제학의 대립과 통합이 우리 삶과 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합니다.

I. 경제학의 두 얼굴: 합리적 인간 vs. 실제 인간

20세기 주류 경제학은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즉 경제적 합리성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이상적 인간을 가정했습니다. 이 ‘경제인’은 완벽한 합리성과 이기심을 바탕으로 모든 정보를 처리하고 최적의 선택을 내리는 존재입니다.

물론 이는 현실과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정은 복잡한 경제 현상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하고 예측 가능한 이론을 세우기 위한 **‘방법론적 필수품’**이었습니다. 덕분에 수요와 공급 법칙, 시장 균형 이론 등 강력한 분석 도구가 발전할 수 있었죠. 행동경제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이론적 우아함을 위해 희생했던 현실의 ‘인간’을 다시 경제학의 중심으로 가져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사건들은 합리적 시장에 대한 믿음을 흔들었습니다. 시장의 거품과 붕괴처럼 합리적 이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 현상(anomalies)‘이 반복되면서, 인간의 심리적 요인을 경제 분석에 포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입니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 인지과학의 통찰을 빌려, 감정과 편향에 영향을 받는 **‘실제 인간(Homo Sapiens)’**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리는지 탐구합니다.

II. 행동경제학의 새벽: ‘제한된 합리성’의 발견

행동경제학의 사상적 뿌리는 197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에게 닿아있습니다. 여러 학문을 넘나든 그는 인간 의사결정을 현실적인 시각에서 탐구했습니다.

행동경제학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허버트 사이먼. 그는 ‘제한된 합리성’ 개념을 통해 인간이 ‘최적화’가 아닌 ‘만족화’ 원리를 따른다고 주장했다.
행동경제학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허버트 사이먼. 그는 '제한된 합리성' 개념을 통해 인간이 '최적화'가 아닌 '만족화' 원리를 따른다고 주장했다. \[이미지: 허버트 사이먼\]

사이먼의 핵심 공헌은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 개념입니다. 인간은 인지 능력과 정보 탐색의 한계 때문에 ‘최적의 해(optimal solution)‘를 찾는 ‘최적화(optimizing)’ 대신,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는 ‘충분히 좋은(good enough)’ 대안을 찾는 ‘만족화(satisficing)’ 원리를 따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비합리성이 변덕스러운 감정 때문이 아니라, ‘문제의 복잡성’과 ‘두뇌의 유한한 처리 능력’ 사이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체계적 현상임을 밝혔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습니다. 이로써 ‘예측 가능한 비합리성’이라는 새로운 연구의 장이 열렸습니다.

III. 인간은 왜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가?

사이먼의 토대 위에서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는 실험을 통해 인간의 비합리성이 예측 가능한 패턴, 즉 **‘체계적 편향(systematic bias)’**임을 입증했습니다.

3.1. 전망 이론 (Prospect Theory): 가치 판단의 새로운 기준

**전망이론(Prospect Theory)**은 행동경제학의 가장 핵심적인 이론입니다.

Advertisement

  • 준거점(Reference Point): 사람들은 최종 자산의 절대량이 아닌, 현재 상태를 기준으로 ‘이득(gain)‘과 ‘손실(loss)‘에 따라 가치를 주관적으로 평가합니다.
  • 손실 회피(Loss Aversion): 이득에서 얻는 기쁨보다 손실에서 느끼는 고통을 약 2~2.5배 더 크게 느낍니다. 이는 우리가 왜 손실에 민감하고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지를 설명합니다.
  • S자형 가치함수: 가치 판단은 비대칭적인 ‘S자형’ 곡선을 따르며, 이득과 손실 모두 그 크기가 커질수록 변화에 둔감해집니다.

Table 1: 기대효용이론과 전망이론의 핵심 가정 비교

특징 (Feature)기대효용이론 (Expected Utility Theory)전망이론 (Prospect Theory)
가치 평가의 기준최종 자산의 절대적 수준준거점(Reference Point)으로부터의 이득/손실
위험에 대한 태도일관된 위험 회피이득 국면에선 위험 회피, 손실 국면에선 위험 추구
가치 함수오목 함수준거점 기준 비대칭적 S자형 함수
손실과 이득의 민감도대칭적손실에 약 2~2.5배 더 민감 (손실 회피)
확률 처리객관적 확률을 선형적으로 가중낮은 확률은 과대평가, 높은 확률은 과소평가

3.2. 프레이밍 효과 (Framing Effect): 문제의 틀이 선택을 결정한다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는 동일한 문제라도 제시되는 틀(frame)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는 현상입니다. ‘아시아 질병 문제’ 실험이 대표적입니다.

  • 긍정적 프레임 (‘200명을 살린다’): 72%가 확실한 대안을 선택 (위험 회피)
  • 부정적 프레임 (‘400명이 죽는다’): 78%가 불확실한 대안을 선택 (위험 추구)

결과는 수학적으로 동일하지만, ‘살린다(이득)‘와 ‘죽는다(손실)‘는 틀에 따라 선호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선택이 합리적 계산이 아닌 심리적 준거점에 크게 좌우된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3.3. 닻내림 효과 (Anchoring Effect) 및 휴리스틱 (Heuristics)

**‘닻내림 효과(Anchoring Effect)’**는 처음 제시된 정보가 ‘닻(anchor)‘이 되어 이후의 판단을 왜곡하는 편향입니다. 전혀 관련 없는 행운의 바퀴 숫자가 UN 회원국 중 아프리카 국가 비율 추정에 영향을 미친 실험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러한 효과는 인간이 복잡한 문제를 풀 때 논리 대신 정신적 지름길, 즉 **‘휴리스틱(heuristics)’**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4. 소유 효과 (Endowment Effect): 내 것의 가치는 다르다

**‘소유 효과(Endowment Effect)’**는 자신이 소유한 물건의 가치를 소유하지 않을 때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는 현상입니다. 저 역시 중고 마켓에 제 물건을 팔 때, 시장 가격보다 높게 부르고 싶은 유혹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이는 손실 회피 성향이 현실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리처드 탈러의 ‘머그컵 실험’에서 컵을 가진 학생들은 팔 희망가로 평균 5.25달러를, 컵을 사려는 학생들은 2.75달러를 제시했습니다. ‘내 것’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거의 두 배로 뛴 것입니다. 컵을 파는 것은 ‘소유물을 포기하는 손실’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Table 2: 주요 행동 편향 요약

편향 (Bias)정의 (Definition)대표 실험 (Canonical Experiment)실생활 사례 (Real-World Example)
프레이밍 효과제시되는 틀에 따라 판단과 선택이 달라지는 현상아시아 질병 문제‘지방 10%’ vs ‘살코기 90%’, 수술 성공률 90% vs 사망률 10%
닻내림 효과처음 정보가 기준점이 되어 이후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행운의 바퀴와 아프리카 국가 수 추정협상 시 첫 제안 가격, 마트의 ‘정상가’와 ‘할인가’ 병기
소유 효과소유한 대상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현상머그컵 실험중고차 판매 시 자신의 차에 더 높은 가격 책정, 주식 매도 주저
현상유지 편향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연금 플랜의 디폴트 옵션구독 서비스 해지를 미루는 행동, 늘 가던 식당만 가는 습관
심리적 회계돈의 출처나 용도에 따라 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현상잃어버린 현금 vs 잃어버린 영화표‘공돈’은 쉽게 쓰고 월급은 아껴 쓰는 심리, 퇴직연금의 보수적 운용

IV. 금융 시장: 효율성 신화와 행동 재무학의 격돌

합리주의와 행동주의의 가장 치열한 전장은 금융 시장입니다. 주류 경제학의 **‘효율적 시장 가설(Efficient Market Hypothesis, EMH)’**은 자산 가격이 모든 이용 가능한 정보를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반영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누구도 지속적으로 시장 평균 수익률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닷컴 버블이나 금융위기와 같은 현상은 EMH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로버트 쉴러(Robert Shiller)**와 같은 행동 재무학자들은 실제 주가 변동성이 기업의 내재가치 변화만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과잉 변동성(excess volatility)’**을 증명했습니다.

Advertisement

행동 재무학은 투자자들의 과신 편향, 군집 행동, 대표성 휴리스틱 등이 ‘비합리적 과열’을 만들어 버블을 형성한다고 설명합니다.

2013년 노벨 경제학상은 효율적 시장 가설의 유진 파마(왼쪽)와 행동 재무학의 로버트 쉴러(오른쪽)에게 공동 수여되며, 두 관점의 통합 필요성을 시사했다.
2013년 노벨 경제학상은 효율적 시장 가설의 유진 파마\(왼쪽\)와 행동 재무학의 로버트 쉴러\(오른쪽\)에게 공동 수여되며, 두 관점의 통합 필요성을 시사했다. \[이미지: 유진 파마와 로버트 쉴러\]

2013년 노벨 경제학상이 EMH의 창시자 유진 파마와 그 비판자인 로버트 쉴러에게 공동 수여된 것은 상징적입니다. 이는 시장이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이지만(파마), 장기적으로는 투자 심리에 의한 거대한 버블과 붕괴에 취약하다(쉴러)는 두 관점 모두가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V. 행동경제학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

행동경제학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러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 이론의 파편성: 수많은 편향의 목록에 불과하며, 이들을 아우르는 통일된 이론이 부족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편향이 나타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 예측력의 한계: 과거 행동을 ‘설명’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미래를 정량적으로 ‘예측’하는 능력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 실험실의 한계: 통제된 실험실 결과가 복잡한 현실 시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지에 대한 ‘외부 타당성’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 학습과 시장의 역할: 개인은 실수를 통해 배우고, 시장은 비합리적 행위자를 도태시켜 장기적으로 합리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VI.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 ‘넛지’의 명과 암

행동경제학의 통찰은 ‘넛지(Nudge)’ 이론을 통해 현실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넛지는 강제나 금지 없이 선택 설계를 변경하여 사람들이 더 나은 결정을 내리도록 부드럽게 유도하는 접근법입니다.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의 남자 소변기에 붙은 파리 스티커는 대표적인 넛지 사례다. 이 작은 개입으로 소변기 청소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의 남자 소변기에 붙은 파리 스티커는 대표적인 넛지 사례다. 이 작은 개입으로 소변기 청소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미지: 소변기 넛지 스티커\]

  • 정책 사례: 퇴직연금 가입을 ‘옵트아웃(기본 가입)‘으로 변경해 저축률을 높이거나, 세금 고지서에 “이웃 90%는 이미 세금을 냈습니다"라는 문구를 넣어 납세율을 높인 것이 대표적입니다.
  • 윤리적 논쟁: 넛지는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적’ 측면과, 국가가 개인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개입한다는 ‘온정적 간섭주의’ 사이에서 논쟁을 낳습니다. 비판론자들은 넛지가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교묘한 ‘조종(manipulation)‘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결국 넛지를 둘러싼 논쟁은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의 복리’ 사이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결론

  • 핵심 요점 요약
  1. 합리성의 한계: 전통 경제학의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현실과 다르며, 인간은 인지적 제약 아래 ‘제한된 합리성’을 가집니다.
  2. 예측 가능한 비합리성: 행동경제학은 전망 이론, 프레이밍 효과 등을 통해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이 체계적이고 예측 가능함을 증명했습니다.
  3. 대립에서 통합으로: 행동경제학은 주류 경제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통찰을 더해 경제학의 설명력을 높이는 통합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 다음 행동 제안 (CTA) 오늘 당신의 소비나 투자 결정 속에서 숨어있는 심리적 편향은 무엇이었나요? 일상 속에서 행동경제학의 원리를 찾아보며 더 나은 선택을 고민해보세요.
참고자료
#행동경제학#호모이코노미쿠스#제한된합리성#넛지#전망이론#리처드탈러

Recommended for You

안전 마진: 워런 버핏은 알고 리먼은 몰랐던 부의 비밀

안전 마진: 워런 버핏은 알고 리먼은 몰랐던 부의 비밀

5 min read --
RWA 토큰화,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는 새로운 방식

RWA 토큰화,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는 새로운 방식

5 min read --
월급은 오르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시간 부자'가 되는 비밀

월급은 오르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시간 부자'가 되는 비밀

6 min read --

Advertisemen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