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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 전쟁: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 동맹의 미래

pho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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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의 관계는 ‘원팀’을 넘어 ‘협력적 경쟁’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 ‘원팀’ 동맹의 탄생 배경
  • HBM 시장의 지각 변동과 두 기업의 생존 전략
  • 차세대 HBM4 기술 경쟁이 반도체 시장에 미칠 영향

신화가 된 서명,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균열

2025년 대만 ‘컴퓨텍스’에서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은 SK하이닉스 부스를 찾아 차세대 메모리 HBM4 웨이퍼에 “JHH Loves SK Hynix!”, “One Team!“이라는 문구를 남겼습니다. 이 순간은 AI 칩 절대 군주와 핵심 메모리 최강자의 기술 동맹이 정점에 달했음을 상징하는 듯 보였습니다.

AI 칩 시장의 80%를 장악한 엔비디아와 그 심장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선도하는 SK하이닉스의 파트너십은 단순한 공급 관계를 넘어 운명 공동체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서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반도체라는 거대한 체스판 아래에서는 거대한 지각 변동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영원한 깐부는 없다"는 명제처럼, 두 거인의 ‘원팀’ 신화는 과연 영원할까요?

젠슨 황 CEO가 SK하이닉스의 HBM4 웨이퍼에 서명하는 모습
엔비디아 젠슨 황 CEO가 SK하이닉스 HBM4에 남긴 친필 사인

1. 도전자의 도박이 만든 ‘원팀’ 신화

이 위대한 동맹의 시작은 ‘만년 2인자’에게 주어진 가혹한 시험이었습니다.

“삼성만큼만 뽑아 봐라”

2015년, 엔비디아는 AI 가속기 GPU의 잠재력을 터뜨릴 핵심 부품으로 HBM을 주목했습니다. 당시 업계 선두주자였던 삼성전자와 함께 SK하이닉스에게도 기회가 왔지만, “삼성만큼만 해보라"는 요구는 그들의 냉정한 현실이었습니다.

언더독의 과감한 베팅

하지만 ‘2인자’라는 위치는 역설적으로 SK하이닉스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은 당시 전체 D램 시장의 1%도 안 되던 불확실한 기술, HBM에 과감히 베팅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잃을 것이 적었기에 더 큰 것을 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기 HBM 사업부는 ‘임원의 무덤’이라 불릴 정도로 고전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 세계 최초 HBM 개발을 시작으로 끈질긴 기술 개발 끝에, 2022년 챗GPT로 AI 시장이 폭발했을 때 엔비디아의 최신 GPU에 HBM3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유일한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기술 해설: AI는 왜 HBM에 열광하는가?

HBM(High-Bandwidth Memory, 고대역폭 메모리)은 AI 시대의 필수품입니다. 기존 D램이 단층 창고라면, HBM은 D램 칩을 수직으로 높이 쌓아 올린 고층 빌딩과 같습니다. ‘실리콘 관통 전극(TSV)’ 기술로 칩들을 연결해 면적을 획기적으로 줄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대역폭’, 즉 데이터가 오가는 길의 너비입니다. 기존 메모리의 데이터 통로가 2차선 국도라면, HBM은 1024차선 초광폭 고속도로와 같아 데이터 병목 현상을 해결하고 AI 연산 속도를 극대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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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램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HBM의 구조
HBM은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를 극대화합니다.

SK하이닉스의 비밀 병기: MR-MUF

SK하이닉스의 결정적 우위는 **‘MR-MUF(Mass Reflow Molded Underfill)’**라는 독자적인 패키징 기술에서 나왔습니다. 수직으로 쌓은 D램 칩 사이의 틈을 액체 보호재로 한 번에 채워 굳히는 방식으로, 공정 효율성과 생산성을 극적으로 높였습니다.

특히 이 기술은 열 방출 효율을 45%나 향상시켜 고성능을 요구하는 엔비디아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2. 제국의 황제, 엔비디아의 새로운 규칙

‘원팀’의 성공은 AI 제국의 황제 엔비디아에게 새로운 전략적 고민을 안겼습니다.

공급망 다변화라는 필연

엔비디아 입장에서 HBM이라는 핵심 부품을 단 하나의 회사(SK하이닉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큰 리스크입니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 공급망 다변화는 필연적인 수순이었습니다.

이는 파트너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경쟁 구도를 만들어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고 가격 협상력을 높이려는 합리적인 경영 전략입니다. 이미 차세대 AI 칩 ‘블랙웰’과 ‘루빈’에는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을 공급망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커스텀 HBM’의 등장

더 근본적인 변화는 **‘커스텀 HBM(Custom HBM)’**의 등장입니다. 이제 HBM은 국제 표준(JEDEC)에 따른 규격화된 상품이 아니라, AI 칩 설계 단계부터 함께 개발되는 맞춤형 솔루션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메모리 제조사와 칩 설계사의 관계를 단순 ‘갑-을’에서 심층적인 기술 파트너십으로 바꾸었습니다. 엔비디아는 이 규칙을 새로 쓰며 시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젠슨 황의 공개적인 칭찬은 최고의 파트너에 대한 감사인 동시에, 다른 공급사들에게 “이 수준을 맞춰야 내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고도의 전략인 셈입니다.

3. 파트너의 반격: SK하이닉스만의 왕국 건설

엔비디아가 공급망 재편에 나서는 동안, SK하이닉스 역시 ‘포스트-엔비디아’ 시대를 대비한 생존 전략을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엔비디아를 넘어 AI 산업 전체로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의 협력으로 얻은 기술력을 발판 삼아 고객 기반 다각화에 나섰습니다. 스스로를 ‘엔비디아의 공급사’가 아닌 **‘AI 산업 전체의 메모리 공급사’**로 재정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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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구글(TPU), 아마존(AWS), AMD 등 엔비디아의 경쟁자 및 자체 AI 칩을 개발하는 빅테크 기업들을 새로운 고객으로 확보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이는 엔비디아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두 거인이 각자의 생존을 위해 동시에 다변화 전략을 추구하는 이 현상은, 한때 독점적이었던 파트너십이 더 넓은 산업 생태계 속에서 공존하는 ‘공생적 탈동조화(Symbiotic Decoupling)’ 관계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비교/대안

HBM4 대전쟁: SK하이닉스 vs 삼성전자

차세대 HBM4 시장을 둘러싼 경쟁은 두 거인의 철학 차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과연 어떤 전략이 AI 시대의 표준이 될까요?

특징SK하이닉스삼성전자
핵심 전략진화적 접근 (검증된 기술 + 전략적 파트너십)혁명적 접근 (혁신 기술 + 수직 계열화)
주력 패키징 기술어드밴스드 MR-MUF (검증된 고수율)하이브리드 본딩으로 전환 시도 (고위험/고수익)
HBM4 베이스 다이TSMC와 협력 (‘최고 조합’ 모델)자체 파운드리 활용 (‘통합형 원팩’ 모델)
시장 위치현 HBM 시장 선두, 왕좌 방어도전자, HBM4로 게임 체인저 베팅

결론: ‘협력적 경쟁’ 시대의 서막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의 관계는 ‘동맹의 종말’이 아닌, 더 복잡하고 역동적인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 핵심 요약:

    1. ‘원팀’ 시대의 종언: 하나의 절대자와 파트너가 시장을 지배하던 시대는 끝나고, 여러 강자가 경쟁하는 다극화된 세계가 열렸습니다.
    2. ‘협력적 경쟁(Co-opetition)‘의 부상: 두 기업은 기술적으로 협력하면서도 시장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새로운 관계 형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3. 혁신의 가속화: HBM4와 차세대 패키징을 둘러싼 치열한 기술 경쟁은 결국 AI 반도체 성능 향상과 공급망 안정화로 이어져 산업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컴퓨텍스에서 젠슨 황이 남긴 사인은 한 시대의 정점을 기록한 기념비이자, 더 거대한 게임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반도체 체스판 위에서 벌어지는 그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한 경쟁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HBM4 전쟁의 최종 승자는 누가 될 것 같나요?

참고자료
#hbm#엔비디아#sk하이닉스#ai반도체#삼성전자#hbm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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