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의 법적 다툼이 암호화폐 시장의 지형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심층적으로 살펴봅니다.
제1부: 랜드마크 분쟁의 기원 (2013-2020)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리플 랩스(Ripple Labs) 간의 법적 분쟁은 단일 기업에 대한 규제 집행을 넘어, 미국 내 디지털 자산의 법적 지위와 규제 미래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이 분쟁의 씨앗은 소송이 제기되기 훨씬 전부터 뿌려졌으며, 리플과 XRP의 탄생, 그리고 SEC가 문제 삼은 자금 조달 방식에 그 기원이 있습니다. 이 섹션에서는 소송의 배경이 된 리플의 초기 역사, SEC의 구체적인 혐의, 그리고 이에 대한 리플의 초기 방어 논리를 알아봅니다.
제1장: 리플과 XRP의 부상
리플 랩스는 2012년 오픈코인(OpenCoin)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며, 신속하고 저렴한 국제 결제를 위한 브릿지 통화(bridge currency)로서 XRP의 고유한 유용성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스위프트(SWIFT)와 같은 레거시 금융 시스템이 가진 비효율성을 해결하려는 시도였습니다. XRP 원장(XRP Ledger, XRPL)은 초당 약 1,500건의 거래를 처리하고 3-5초 내에 거래를 완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설계되었으며, 이는 비트코인과 같은 초기 블록체인 기술에 비해 월등한 성능을 보였습니다.
소송의 핵심 쟁점이 된 부분은 XRP의 초기 분배 방식이었습니다. 창립자들은 상당량의 XRP를 리플 랩스에 “기부"했고, 회사는 이 자산을 운영 자금 조달 및 시장 안정화 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업이 보유한 자산을 매각하여 사업 개발 자금을 마련하는 이 행위는 SEC가 XRP 판매를 **‘미등록 증권 발행’**으로 규정하는 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습니다. SEC가 소송을 제기하기 전까지 XRP는 이미 시장에서 주요 디지털 자산으로 자리 잡았으며, 12년 이상의 운영 기간 동안 XRPL에서 수십억 건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처리하며 그 유용성을 입증해왔습니다.
제2장: SEC의 혐의 (2020년 12월)
2020년 12월 22일, SEC는 리플 랩스와 공동 창립자 크리스 Larsen, 그리고 CEO 브래드 갈링하우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SEC의 핵심 주장은 리플이 2013년부터 XRP를 판매하며 13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는 미등록 증권의 지속적인 공모 및 판매에 해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SEC의 법적 근거는 1933년 증권법(Securities Act of 1933)에 기반을 두었으며, 리플에 의한 XRP 판매가 ‘투자 계약’(investment contract) 의 정의를 충족하므로 증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리플이 증권법 제5조를 위반하여 등록 신고서를 제출하지 않고 증권을 판매했다고 기소했습니다. SEC는 리플의 미등록 행위가 “정보의 공백”(information vacuum) 을 초래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투자자들이 투자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중요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채, 리플이 선택적으로 공개하는 정보에만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소송은 단순히 리플이라는 한 기업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SEC가 ‘집행을 통한 규제’(regulation by enforcement) 라는 전략을 통해 사법적 판례를 확립하고, 이를 통해 전체 디지털 자산 시장에 대한 광범위한 관할권을 확보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수년간 규제 공백 상태에 있던 암호화폐 산업에 대해, SEC는 명확한 규칙을 제정하거나 입법적 권한을 모색하는 대신, 1946년의 ‘하위 테스트’(Howey Test) 를 새로운 기술에 적용하는 소송 방식을 택했습니다.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XRP를 표적으로 삼음으로써, SEC는 단 한 번의 승소로 업계 전반에 걸쳐 강력한 법적 선례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는 리플 소송의 결과가 다른 거래소와 토큰 발행사들에게도 실존적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제3장: 리플의 초기 방어 전략
SEC의 기소에 맞서 리플은 XRP가 증권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하게 부인했습니다. 리플은 XRP가 리플넷(RippleNet) 플랫폼에서 국제 결제를 촉진하는 교환 매개체로서의 유용성을 가진 통화 또는 상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리플의 방어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공정 고지’(fair notice) 방어였습니다. 리플은 SEC가 XRP를 증권으로 간주한다는 명확한 지침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리플이 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SEC의 집행 조치가 적법 절차 원칙에 위배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법원이 나중에 이 방어 논리를 인정하기로 한 결정은 리플에게 중요한 절차적 승리였습니다.
또한 리플은 SEC의 소송 제기 시점과 동기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소송이 제이 클레이튼 당시 SEC 위원장의 임기 마지막 날에 제기되었다는 점, 그리고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과 같은 다른 주요 디지털 자산에 대해서는 SEC가 다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지적하며 규제의 일관성 부족을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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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법적 전쟁 (2021-2023)
소송이 본격화되면서 양측은 ‘하위 테스트’의 적용을 두고 치열한 법리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송의 향방을 가를 결정적 증거로 부상한 ‘힘만 문서(Hinman Documents)‘를 둘러싼 공방은 법정 드라마의 한 장면과도 같았습니다. 한편, 법정 밖에서는 SEC의 소송 제기가 XRP 시장에 즉각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4장: 현미경 아래 놓인 하위 테스트
하위 테스트는 특정 거래가 ‘투자 계약’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4가지 기준으로 구성됩니다:
- 금전의 투자(investment of money)
- 공동 사업(common enterprise)에 대한 투자
- 타인의 노력으로 인한 수익에 대한 합리적 기대(reasonable expectation of profits to be derived from the efforts of others)
SEC는 리플의 세 가지 판매 유형(기관 대상 판매, 프로그램 방식 판매, 기타 배포) 모두가 이 기준을 충족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구매자들이 리플 생태계라는 공동 사업에 자금을 투자했으며, 리플이 네트워크를 개발하고 XRP의 사용을 촉진함으로써 그 가치를 상승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투자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리플은 특히 거래소에서의 프로그램 방식 판매의 경우 이 기준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반박했습니다. 구매자들은 자신이 리플로부터 XRP를 구매한다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리플과 직접적인 계약 관계나 투자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으며, 수익에 대한 기대 역시 리플의 노력보다는 암호화폐 시장 전반의 동향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법원은 리플이 하위 테스트에 ‘필수 요소’를 추가하려는 시도는 기각하며, 하위 테스트가 분석의 중심임을 재확인했습니다.
제5장: 힘만 문서를 둘러싼 전투
‘힘만 문서’는 2018년 당시 SEC 기업금융국장이었던 윌리엄 힘만이 한 연설과 관련된 SEC 내부의 초안, 이메일, 회의록 등을 지칭합니다. 이 연설에서 힘만은 디지털 자산이 처음에는 증권으로 제공되었더라도, 네트워크가 “충분히 탈중앙화"되면 더 이상 증권이 아닐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특히 그는 당시 이더리움이 증권이 아니라고 본다고 언급하여 시장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리플은 이 문서가 자신들의 ‘공정 고지’ 방어에 결정적이라고 주장하며 18개월 이상에 걸쳐 문서 확보를 위해 싸웠습니다. SEC 내부에서조차 토큰의 증권성 여부에 대한 기준을 두고 논쟁이 있었다면, 시장 참여자들이 어떻게 명확한 고지를 받을 수 있었겠냐는 논리였습니다. SEC는 변호사-의뢰인 비밀유지 특권 등 다양한 이유를 들어 문서 공개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법원, 특히 사라 넷번 연방치안판사는 거듭 리플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넷번 판사는 SEC가 한편으로는 힘만 연설이 개인적 의견이라 특권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특권이 적용되는 기관의 심의 과정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선”(hypocrisy) 이라고 강하게 질책했습니다. 이 판결은 SEC의 신뢰도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문서 공개를 통해 SEC 내부의 의견 불일치와 힘만의 전 직장이었던 법무법인과 이더리움 생태계 간의 잠재적 이해 상충 문제까지 드러났습니다.
이 힘만 문서를 둘러싼 공방은 단순한 증거 개시 절차를 넘어 SEC의 규제 과정과 진실성에 대한 공개적인 심판의 장이 되었습니다. SEC의 핵심 법적 도구인 하위 테스트는 해석이 필요한 원칙 기반의 기준이었습니다. 힘만의 연설은 고위 관리가 디지털 자산에 대한 해석을 제공한 가장 중요한 공개적 시도였습니다. 리플의 법무팀은 이 내부 문서를 ‘공정 고지’ 방어의 증거로 삼는 것을 넘어, SEC가 내세우는 ‘명확성’이 내부적으로도 전혀 명확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넷번 판사의 “위선"이라는 질책은 규제 기관의 신뢰도에 치명타를 입혔고, SEC의 법적 입장이 일관된 정책 적용보다는 소송에서의 유불리에 따라 수립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다른 암호화폐 기업들이 SEC에 맞서 법정 다툼을 벌이도록 용기를 주었고, SEC가 자의적으로 규제를 집행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정치인들에게 강력한 무기를 제공했습니다. 힘만 사가는 SEC가 주장하려던 바로 그 규제 권위를 약화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제6장: 포위된 시장 (2020-2023)
SEC의 소송은 암호화폐 시장에 거대한 충격파를 던졌습니다. 코인베이스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거래소들은 규제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즉시 XRP 거래를 중단하거나 상장 폐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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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치는 XRP 가격의 폭락으로 이어졌고, 시가총액이 약 150억 달러 증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당시 상승장에 진입하던 다른 암호화폐 시장과 달리, XRP는 법적 리스크로 인해 가격이 급락하며 시장 전체의 움직임과 뚜렷한 디커플링 현상을 보였습니다. XRP/BTC 비율은 2020년에 역사적 최저치를 기록하며 법적 공포가 시장에 미친 영향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시장 붕괴는 소송 당사자가 아닌 일반 XRP 보유자들에게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안겼습니다. 이는 ‘XRP 군단’(XRP Army) 으로 불리는 크고 조직적인 투자자 커뮤니티를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은 리플의 소송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약 75,000명이 법정 조언자 의견서(amicus brief)를 제출하는 등 이례적인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제3부: 토레스 판결과 그 이후 (2023-2025)
수년간의 지리한 법적 공방 끝에, 2023년 7월 아날리사 토레스 판사의 약식 판결은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판결은 양측 모두에게 부분적인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법적 논쟁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이후 벌금과 제재를 결정하는 구제 단계, 양측의 항소, 그리고 극적인 합의 시도와 실패 과정은 소송의 복잡성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제7장: 양분된 판결 - 2023년 7월 약식 판결
2023년 7월 13일, 토레스 판사는 양측 모두에게 일부 승리를 안겨주는 역사적인 약식 판결을 내렸습니다.
판결의 핵심은 XRP 판매 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각각 다른 법적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첫째, 리플이 헤지펀드 등 기관 투자자들에게 직접 계약을 통해 XRP를 판매한 ‘기관 대상 판매’ 는 미등록 증권 판매에 해당한다고 판결했습니다. 판결의 근거는 이들 투자자가 리플의 마케팅과 생태계 개발 약속에 근거하여 수익을 기대할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둘째, 리플과 암호화폐 업계에 기념비적인 승리를 안겨준 부분으로,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일반 대중을 상대로 이루어진 ‘프로그램 방식 판매’ (구매자와 판매자가 서로를 알 수 없는 블라인드 입찰/호가 거래)는 증권 판매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판결의 핵심 논리는 일반 구매자들은 자신이 리플로부터 XRP를 구매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리플의 사업적 노력으로부터 수익을 기대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프로모터와 투자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자산 그 자체를 구매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셋째, 직원 보상 등 ‘기타 배포’ 방식의 XRP 지급 역시 ‘금전의 투자’ 요건을 충족하지 않으므로 증권 거래가 아니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 판결은 “자산 자체가 아니라 판매의 맥락이 중요하다” 는 선례를 남겼습니다. 이전까지의 질문이 “토큰 X는 증권인가?“였다면, 토레스 판결은 질문을 “어떤 상황에서 토큰 X의 ‘판매’가 증권 거래에 해당하는가?“로 바꾸었습니다. 이는 동일한 자산이라도 거래의 ‘총체적 상황’, 특히 구매자의 인식과 기대에 따라 한 거래에서는 증권으로, 다른 거래에서는 비증권으로 취급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2차 시장 거래에 대한 명확성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규제 분석을 거래 단위로 수행해야 하는 복잡성을 낳았습니다. 이 판결은 다른 암호화폐 프로젝트들에게는 방어 논리를 제공했지만, 시장 전체에 단순하고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향후 수많은 법적 분쟁의 소지를 남겼습니다.
토레스 판사의 판매 유형별 법적 추론 요약
법적 요인 (하위 테스트) | 기관 대상 판매 (증권) | 프로그램 방식 판매 (비증권) |
---|---|---|
금전의 투자 | 예. 계약에 따라 리플에 직접 자금 지불. | 예. 구매자들이 거래소에서 자금 지불. |
공동 사업 | 예. 자금 풀링을 통한 수평적 공동성 인정. | 제3 요건 불충족으로 사실상 무의미. |
수익에 대한 기대 | 예. 전문 투자자들은 리플의 마케팅과 생태계 구축 약속을 기반으로 구매. | 아니요. 익명의 구매자들은 자금이 리플로 간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리플의 특정 노력에서 비롯되는 수익을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없었음. |
타인의 노력 | 예. 리플의 경영 및 사업적 노력에서 직접적으로 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기대. | 아니요. 블라인드 입찰/호가 방식의 거래는 구매자의 기대와 판매자(리플)의 노력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음. |
법원의 결론 | 투자 계약 (증권) | 투자 계약 아님 (증권 아님) |
제8장: 구제 단계와 최종 판결 (2024년 8월)
2023년 7월 판결 이후, 소송은 기관 대상 판매 위반에 대한 처벌을 결정하는 구제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SEC는 처음에 부당 이익 환수, 이자, 벌금을 포함하여 무려 20억 달러를 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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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7일, 토레스 판사는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판사는 기관 투자자들이 금전적 피해를 입었다는 증거가 없다며 SEC의 막대한 부당 이익 환수 요구를 기각했습니다. 대신, 리플에 1억 2,503만 5,150달러의 민사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또한 법원은 리플이 향후 유사한 미등록 기관 대상 판매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영구적인 금지 명령(injunction) 을 내렸습니다. 이 금지 명령은 이후 합의 과정에서 중요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제9장: 항소와 실패한 합의 (2024-2025)
판결 이후 양측 모두 항소했습니다. SEC는 2024년 10월, 프로그램 방식 판매에 대한 판결에 항소했으며, 리플은 기관 대상 판매 판결에 대해 맞항소했습니다.
그러나 2024년 대선 이후 행정부 교체와 함께 SEC의 강경한 암호화폐 정책 기조가 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2025년 3월, SEC는 항소를 취하할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이후 2025년 5월, 양측은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합의 조건은 법원이 영구 금지 명령을 해제하고 벌금을 1억 2,500만 달러에서 5,000만 달러로 감액해 주면 SEC가 소송을 취하하고, 리플도 맞항소를 취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2025년 6월, 토레스 판사는 이 공동 합의 요청을 단호하게 기각했습니다. 판사는 공익 보호와 미래의 법 위반 방지를 위해 내려진 법원의 최종 판결을 당사자들이 사적인 합의를 통해 무효화할 권한이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는 적절한 방법은 항소 법원을 통하는 것이지, 판사 자신에게 판결을 뒤집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 결정은 사법부의 권위가 행정부의 정책 변화보다 우위에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 사례입니다. 새로운 행정부의 등장으로 SEC의 집행 기조가 바뀌자, 양측은 법원이 자신들의 합의를 추인해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토레스 판사의 기각은 법원의 판결이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쉽게 번복될 수 없으며, 법적 기록과 공익 보호라는 원칙에 기반한다는 점을 재확인시켰습니다. 이는 법적 선례와 판결이 정치적 주기를 초월하는 내구성을 가짐을 보여주며, 규제 기관이 소송을 시작하거나 중단할 수는 있지만, 일단 내려진 법원의 최종 명령을 일방적으로 무효화할 수는 없다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강화했습니다.
판사의 기각 이후, 리플은 맞항소를 철회하겠다고 발표하며 SEC가 항소를 공식적으로 취하하도록 압박했습니다. 이것이 사건 종결을 위한 마지막 단계로 남아있습니다. 리플은 이미 벌금 1억 2,500만 달러를 에스크로 계좌에 예치했으며, 항소가 공식적으로 기각되는 즉시 지급될 예정입니다.
제10장: 법적 명확성(과 혼란)에 대한 시장의 반응
2023년 7월 판결은 XRP에 대한 거대한 호재로 작용했습니다. 판결 직후 코인베이스와 같은 거래소들이 XRP를 재상장하면서 가격은 75% 이상 급등했고, 거래량은 300% 폭증했습니다.
온체인 데이터에서도 이러한 긍정적 심리가 확인되었습니다. 100만 개 이상의 XRP를 보유한 ‘고래’ 지갑의 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대규모 투자자들의 매집을 시사했고, 일일 활성 주소 수도 급증하여 네트워크 사용량과 개인 투자자들의 관심이 증가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이후의 법적 절차 뉴스에도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SEC가 항소 의사를 밝히자 가격은 15% 하락했고, 2025년 3월 SEC가 항소를 포기할 것이라는 소식에는 다시 10% 급등했습니다. 2025년 6월 판사가 합의안을 기각했을 때는 일시적으로 5-6% 하락했다가 안정세를 되찾았습니다. 이는 소송 관련 뉴스가 XRP의 시장 가치에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제4부: 리플, XRP, 그리고 디지털 자산의 미래 지형
법정 다툼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이제 시장의 관심은 소송 이후의 미래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리플의 장기적인 사업 전략, 미국의 암호화폐 규제 환경, 그리고 글로벌 규제 동향 전반에 걸쳐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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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소송 이후 시대의 리플 전략
법원의 금지 명령으로 인해 미국의 기관 대상 판매가 제약을 받게 되면서, 리플은 이미 사업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글로벌 시장에 더욱 집중하고 있습니다. 핵심 전략은 XRP를 브릿지 통화로 사용하는 국경 간 결제 서비스 ‘ODL(On-Demand Liquidity)‘의 확장입니다. 특히 신흥 시장을 중심으로 ODL 거래량은 꾸준히 증가하여, 리플넷을 통한 누적 처리액은 70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SEC의 소송은 역설적으로 리플이 사업 다각화를 가속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소송 전 리플의 정체성은 거의 전적으로 XRP를 이용한 국제 결제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송이 이 핵심 사업 모델을 위협하자, 리플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2024년 12월, 뉴욕 금융감독청(NYDFS)의 엄격한 규제 하에 1:1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RLUSD(Ripple USD)’ 를 출시했습니다. 이는 변동성이 큰 XRP를 보완하여 기관 결제 시장에서 안정적인 자산을 제공하는 전략적 움직임입니다.
또한, 리플은 부동산, 원자재, 증권과 같은 ‘실물자산(Real-World Assets, RWA)‘을 토큰화하는 플랫폼으로서 XRPL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두바이 토지부(DLD)의 부동산 토큰화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파트너십은 이 분야에서의 중요한 성과입니다. 이처럼 SEC의 공격은 리플을 제약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다각화되고 회복력 있는 핀테크 기업으로 진화시키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리플의 장기적인 비전은 “전체 은행 시스템을 재구성"하여 SWIFT 네트워크를 대체하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리플 기술의 속도와 비용 효율성을 인정하면서도, 11,000개 이상의 금융기관이 참여하는 SWIFT의 거대한 네트워크 효과가 여전히 강력한 장벽이라고 분석합니다. 따라서 완전한 대체보다는 특정 결제 경로를 장악하거나 상호 보완적인 하이브리드 모델이 될 가능성이 더 높게 점쳐집니다.
제12장: 변화하는 미국의 암호화폐 규제
리플 소송으로 대표되는 SEC의 ‘집행을 통한 규제’ 방식은 상당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암호화폐 산업이 친(親)암호화폐 성향의 후보를 당선시키고 관련 법안을 제정하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로비 및 정치 자금 지출을 감행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페어셰이크(Fairshake)‘라는 슈퍼팩(Super PAC)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리플(4,500만 달러), 코인베이스(4,650만 달러), 앤드리슨 호로위츠(4,400만 달러) 등이 주요 자금원으로 참여한 페어셰이크는 2024년 선거 주기 동안 1억 6,2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하며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단체 중 하나로 부상했습니다. 업계 전체적으로는 1억 달러 이상이 정치 자금으로 지출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영향력은 2025년 들어 구체적인 입법 성과로 나타났습니다.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 이 법률로 제정되어 결제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연방 차원의 규제 프레임워크를 마련했으며, 이는 RLUSD와 같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게 명확성을 제공합니다. 또한 하원을 통과한 ‘클래리티 법안(CLARITY Act)’ 은 리플 소송의 핵심 쟁점이었던 디지털 자산의 증권 및 상품 분류 기준을 명확히 하고 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간의 관할권을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2024년 대선 이후 새로 구성된 SEC는 ‘암호화폐 태스크포스’를 신설하고, 코인베이스, 바이낸스 등과의 소송을 중단하거나 취하하는 등 이전 행정부의 강경 일변도 정책에서 벗어나 보다 협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과정은 규제 기관과 피규제 산업 간의 힘의 균형에 역사적인 변곡점을 시사합니다. 과거 금융 규제가 SEC와 같은 기관에 의해 하향식으로 결정되었다면, 리플 소송은 탈중앙화되고 글로벌하게 분포하며 정치적으로 동원된 산업이 국가 규제 기관의 의제에 성공적으로 도전하고 재편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SEC가 규칙 제정 대신 소송을 택했을 때, 리플은 법정뿐만 아니라 여론과 정치의 장에서도 싸웠습니다. 그 결과, 의회가 직접 개입하여 SEC의 관할권을 명시적으로 제한하는 법안을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21세기 기술 산업에 대한 ‘집행을 통한 규제’가 오히려 규제 환경 자체의 입법적 재편을 초래할 수 있는 고위험 전략임을 보여주는 선례가 되었습니다.
제13장: 글로벌 규제 모자이크
미국이 소송으로 혼란을 겪는 동안, 다른 주요국들은 명확한 규제 프레임워크를 구축하며 앞서 나갔고, 이는 미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우선시하는 전략을 채택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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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연합 (EU): 2023년부터 시행된 ‘미카(MiCA, Markets in Crypto-Assets)’ 법안은 EU 27개 회원국 전체에 적용되는 포괄적인 암호화폐 규제 체계를 제공합니다. 리플은 룩셈부르크 법인을 통해 미카 라이선스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4억 5천만 명 인구의 거대 시장에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패스포트’ 권한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영국 (FCA): 영국 금융감독청(FCA)은 XRP를 비트코인, 이더리움과 같은 ‘교환 토큰’(exchange token) 으로 분류하여 증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괄적인 법규의 부재로 인해 영국 은행들이 리플과의 협력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신속한 입법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 일본 (FSA): 일본 금융청(FSA)은 결제서비스법(PSA)에 따라 XRP를 증권이 아닌 ‘암호자산’ 으로 일찍이 규정하여 명확성을 제공했습니다. 이 덕분에 일본은 리플과 현지 파트너인 SBI 홀딩스에게 중요한 시장이 되었습니다.
- 싱가포르 (MAS): 싱가포르 통화청(MAS)은 결제서비스법을 통해 명확한 규제 환경을 조성하여 아시아의 대표적인 암호화폐 허브로 부상했습니다. 리플은 2017년 이곳에 아시아태평양 본사를 설립했으며, 2023년에는 ‘주요 결제 기관’(MPI) 라이선스를 취득하여 규제 하에 디지털 결제 토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요 관할권별 XRP 규제 현황 비교
관할권 | 규제 기관 | XRP의 법적 지위 |
---|---|---|
미국 | SEC / 연방 법원 | 판매 맥락에 따라 증권/비증권으로 구분 |
유럽 연합 | ESMA / 각국 규제 당국 | 증권이 아닌 암호자산 (MiCA) |
영국 | 금융감독청 (FCA) | ‘교환 토큰’ (비증권) |
일본 | 금융청 (FSA) | ‘암호자산’ (비증권) |
싱가포르 | 통화청 (MAS) | ‘디지털 결제 토큰’ (DPT) |
제14장: 결론 분석 - SEC 대 리플 소송의 영속적 유산
SEC 대 리플 소송은 단순한 법규 집행 사건에서 출발하여 수년에 걸친 법적, 정치적, 시장을 재정의하는 거대한 서사로 발전했습니다. 이 사건이 남긴 가장 지속적인 유산은 “디지털 자산은 그 자체로 증권이 아니며, 그 분류는 판매의 맥락에 따라 결정된다” 는 ‘토레스 독트린’(Torres Doctrine) 입니다. 이는 미국 내 모든 디지털 자산에 대한 법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사건은 또한 ‘집행을 통한 규제’ 전략의 한계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 연구가 되었습니다. 자금력과 정치력을 갖춘 새로운 산업에 대해 이러한 접근 방식을 사용할 경우, 이는 규제 기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강력한 정치적, 입법적 반발을 초래할 수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소송의 종결과 새로운 미국 법률의 제정, 그리고 글로벌 규제의 명확성 증대는 암호화폐 규제의 혼란스러웠던 초기 단계가 끝나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음 단계는 XRP ETF 승인, RWA 토큰화 확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보다 명확한 규칙, 증가하는 기관의 참여, 그리고 글로벌 금융 시스템 내에서 디지털 자산이 더욱 성숙하고 통합된 역할을 수행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리플 소송은 좋든 싫든, 이러한 전환을 이끌어낸 고통스러운 촉매제였습니다.